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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라이어> 성공한 거짓말, 엘리베이터와 계단씬, 속는 자

by borybory-click 2025. 5. 3.

영화 &lt;굿 라이어&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9. 12. 05.
  • 장르: 스릴러
  • 평점: 8.80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9분
  • 감독: 빌 콘돈
  • 주연: 헬렌 미렌, 이안 맥켈런

 

1. 성공한 거짓말이 뇌에 주는 보상 시스템

거짓말이 성공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뇌에서 분비되는 보상 신경전달물질의 결과이며, 이 생물학적 작용은 반복될수록 강화된다. 영화 <굿 라이어>의 주인공 로이는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다. 그는 상대의 심리를 교묘하게 읽고, 서사의 흐름조차 조작할 수 있는 노련한 전략가다. 그가 치밀하게 계획한 사기가 성공할 때마다, 관객은 단순한 반감이나 혐오보다는 묘한 긴장과 흥미를 함께 느낀다. 이 감정은 사실 관객만 느끼는 게 아니라, 로이 자신도 느끼는 감정이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크고 짜릿한 보상감을 내면에서 맛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거짓말이 성공했을 때 뇌는 실제로 도파민을 분비한다. 도파민은 쾌락과 보상, 동기부여에 관련된 신경전달물질로,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혹은 위험을 넘겼을 때 집중적으로 활성화된다. 특히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도파민 분비량은 급증한다. 로이처럼 상대를 속여 이득을 취하거나, 위기를 빠져나갔을 때 뇌는 이것을 일종의 ‘업적’으로 인식한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뇌는 결과 중심으로 반응한다. 도덕보다 생존과 보상이 더 본능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뇌의 작용은 일종의 ‘사기 중독’ 현상과도 연결된다. 반복적으로 거짓말이 성공하고, 그로 인해 쾌감이 강화되면 뇌는 그 행동을 ‘학습’한다. 보상회로가 강화되고, 행동 패턴이 고착된다. 마치 도박이나 약물 중독처럼, 리스크가 클수록 보상이 크다고 느껴지는 역설적인 심리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로이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에는 스릴, 컨트롤, 게임적 쾌감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복합적인 감정은 단순한 이익 추구와는 다른 차원의 동기를 제공한다. 그것이 바로 ‘사기꾼’이라는 캐릭터가 관객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심리적 배경이다. 실제로 사기꾼은 일반적인 범죄자와 다르게 행동의 결과보다 ‘과정’에 더 중독된다고 알려져 있다. 누군가를 속이고, 그 속임수를 완벽하게 유지하며, 결국 상대가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보는 행위 자체에서 큰 만족을 느낀다. 이것은 뇌의 ‘내측 전전두피질(medial prefrontal cortex)’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주도권을 쥐는 감정은 원초적으로 뇌의 보상 시스템을 자극한다. 즉, 거짓말이 성공하면 뇌는 그것을 보상할 만한 일이라고 여긴다. <굿 라이어>에서 로이가 보여주는 감정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계산하고 통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사기가 성공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번지는 아주 미묘한 미소나 눈빛은 그가 느끼는 뇌적 쾌락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 미소는 결코 과장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승리의 전율이 숨어 있다. 말하자면, 그가 느끼는 보상은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 있으며, 이는 반복되는 거짓말의 원동력이 된다. 도파민의 분비는 단순한 감정 작용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뇌의 신경 구조에도 영향을 준다. 보상받은 경험이 반복될수록, 관련된 행동 회로는 더욱 튼튼해진다. 이 회로는 도덕적 판단 영역인 측두엽과의 연결을 무디게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그로 인해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감정 회로와 판단 회로가 분리되며, 자신만의 ‘도덕 기준’을 만들어가게 된다. 로이는 바로 이런 구조를 통해 죄책감 없이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인물이 된다. 그는 단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쁜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도록 뇌가 학습된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기 행위는 단순한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뇌의 구조와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다. 사람마다 도파민 반응의 민감도는 다르고, 쾌감을 느끼는 지점 또한 다르다. 누군가는 정직함에서, 누군가는 경쟁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거짓에서 도파민을 얻는다. 로이 같은 인물은 후자의 유형이며, 그가 진심으로 거짓말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는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심지어 그가 어떤 행동을 하기 직전에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바꾸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바로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는 시점이다. 실제로 신체적 흥분 반응도 동반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보상 중독’은 반드시 범죄나 악행으로만 발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서, 어떤 사람은 예술에서 비슷한 구조를 가진 보상 메커니즘을 갖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쾌감의 방향성이다. 로이의 경우 그것이 타인을 속이는 행위에 집중되어 있었고, 영화는 그 쾌감의 궤적이 결국 어떻게 무너지거나 회복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공한 거짓말이 주는 뇌의 보상은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 기억은 뇌에 각인되며, 다음 행동의 ‘정당성’으로 기능하게 된다. 인간은 논리보다 감정에 의해 행동을 더 쉽게 정당화한다. 이때 감정은 도파민이 이끄는 쾌감이며, 도덕을 무디게 만드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굿 라이어>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무너뜨리는 거짓말의 정체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위험한 것인지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 엘리베이터와 계단씬으로 본 권력의 위아래

영화 <굿 라이어>를 보며 인물 간 권력의 흐름이 어떻게 미세하게 이동하는지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단지 대사나 사건 전개뿐 아니라 연출의 디테일에서도 그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엘리베이터와 계단 장면은 단순한 공간적 이동을 넘어서 인물 간의 힘의 구조, 심리적 우위, 주도권의 이동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물리적 행위는 사실상 권력의 상징이며, 감독은 그 상징을 극도로 절제된 화면 속에서 명확하게 제시한다.

로이라는 인물은 극 전반에서 ‘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설계된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고, 상황을 컨트롤하며, 능동적으로 대화를 주도한다. 그가 베티에게 접근할 때도, 마치 계획된 수순처럼 정중함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관계의 상단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엘리베이터라는 닫힌 공간에서 그는 혼자, 혹은 특정한 타인과 함께 하강하거나 상승한다. 이때 관객은 그의 표정과 자세, 대화의 맥락을 통해 ‘지금 이 순간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읽게 된다. 반면 계단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로이가 누군가와 함께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는, 그가 누군가를 유도하고 있는 상황일 때가 많다. 계단이라는 공간은 시선이 분리되고, 발걸음의 높낮이 차이가 발생하며, 두 인물 간 거리가 물리적으로도 다르게 구성된다. 특히 계단에서의 대화는 평지보다 훨씬 더 위계적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더 안정적이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게 되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우위와 열위가 분명하게 나뉜다. <굿 라이어>에서 인물 간 관계는 일정한 흐름을 갖고 변화한다. 처음에는 로이가 분명히 위였다. 그가 베티를 안내하고, 그녀의 삶에 들어서며, 조작된 과거를 꾸며내고, 금융 사기를 위한 계획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높은 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자의 안도감처럼 묘사된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이 위치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로이가 잠깐 멈칫하거나, 계단을 오를 때 베티가 그보다 한 발 앞서 걷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지만, 카메라가 둘의 높낮이를 다르게 포착하면서 관객은 이미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것을 감지한다. 결정적인 장면은 후반부, 베티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로이가 ‘내려가는’ 구조 속에 갇히는 시점이다. 그때의 엘리베이터 장면은 더 이상 이동 수단이 아니라, 그가 어디론가 추락하고 있다는 명확한 비유다. 동시에 계단을 내려가는 로이의 뒷모습은, 더 이상 누군가를 통제하는 위치가 아닌, 누군가에게 밀려내려가는 존재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베티는 말 그대로 ‘위에 있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계단 상단에 서 있고, 로이는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본다. 물리적 위치가 심리적 위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상징적 연출은 단지 공간의 활용을 넘어, 인물의 내면 변화까지 표현한다. 로이가 처음에는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 그리고 베티가 내내 순진한 척하며 사실상 전장을 설계해 온 침묵의 시간은 공간을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엘리베이터는 밀폐되고 수직적인 구조로, 제한된 선택지를 의미한다.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다. 그 안에서의 대화는 직면이며, 탈출구가 없다. 로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감정이 가장 흔들리고, 결국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무너진다. 계단은 그보다 더 은유적인 공간이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감정의 무게가 실리고, 상승과 하강의 과정 자체가 힘의 역전을 시각화한다. 영화 후반, 베티가 로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은, 그녀가 이제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장면이다. 시선을 맞추며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 우위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그 장면에서 로이는 더 이상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없고,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다는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이런 이동 장면들은 단순한 배경이나 전환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과 감정의 뼈대를 드러내는 도구다. <굿 라이어>가 다른 범죄 서사와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디테일한 연출과 상징체계 덕분이다. 말 한마디 없이도 권력의 구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방식은 굉장히 세련되고 깊이 있다. 그리고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그 높낮이를 기억한다. 로이가 계단을 오르며 여유롭게 대화를 이끌던 순간, 그리고 그가 내려가는 장면에서 보이는 작아진 몸짓은, 이야기의 결과와 감정의 해답을 예고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매력은 그 상징들이 과하지 않다는 점이다. 계단은 계단이고,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인물이 위치를 점유하고, 대사를 나누고, 움직이는 순간, 그 모든 요소는 단지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일부가 된다. 이처럼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닌 감정과 권력의 지도이며, <굿 라이어>는 그 지도를 조용히 그러나 정교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높낮이의 이동을 따라가며, 인간관계에서 진짜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3. '믿는 자'가 아니라 '속는 자'가 살아남는 세상

믿는 사람이 항상 손해를 본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직한 사람, 순수한 사람,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많이 입는다는 걸 목격하게 된다. 영화 <굿 라이어>는 이 오랜 진실을 더욱 뼈아프게, 그리고 교묘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누군가를 믿은 대가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하고, 반대로 믿음을 가장해 누군가의 삶을 조종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기극을 넘어, ‘누가 살아남는가’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하다. 이 세상은 믿는 자가 아닌, 속는 자가 살아남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

로이 코트니는 완벽하게 구축된 거짓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이름도 거짓이고, 직업도 거짓이고, 심지어 표정조차 매 순간 계산되어 있다. 그런 그가 노년의 여성 베티에게 접근한다. 첫인상은 점잖고, 예의 바르며, 다정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의 '전략'이다. 이 영화의 초반은 로이가 얼마나 노련하게 상대방을 파악하고, 어떤 방식으로 신뢰를 얻고, 언제 타격을 가할지 정교하게 계산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조용한 속임수’와 아주 닮아 있다. 속는 사람은 처음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하고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다. 베티 역시 로이에게 마음을 여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편을 잃은 뒤 홀로 살아온 그녀에게, 다정한 대화 상대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다가온 로이는 고마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믿음은 오히려 그녀를 위험으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는 흔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열어주는 것’이고, 그건 곧 취약해진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단지 속임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의 ‘뒤집힘’에 있다. 베티는 예상과 달리 속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히려 그녀는 로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계획을 짜고, 감정을 숨기고, 거짓된 이미지를 연기해 왔다. 겉으로는 속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속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영화는 이 반전을 통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속는 척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어쩌면 진짜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베티는 감정을 통제하고, 무표정 속에 수많은 복선을 숨긴다. 로이가 대화를 주도하는 듯하지만, 실은 베티가 한 발짝 뒤에서 전부 보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관계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속이는 사람은 늘 주변에 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건, 그걸 알면서도 속아주는 사람, 아니 속는 ‘척’하는 사람이다. 현실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런 역할들을 경험한다. 직장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누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누가 더 많은 걸 감추고 있는지에 따라 권력의 균형은 달라진다. 겉으로는 믿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계산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굿 라이어>는 인간의 생존 방식에 대한 통찰이다. 진심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 그러니 적어도 속는 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로이는 끝까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사람은 모두 욕심이 있고, 그 욕심을 건드리면 누구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믿은 것이다. 그가 베티를 완전히 속였다고 믿었던 순간은, 오히려 자신이 가장 크게 속고 있었던 순간이었다. 이 아이러니가 주는 통쾌함은 단순한 반전의 재미를 넘어, 복잡한 인간 심리의 함정까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진짜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로이도 베티도, 영화 속 어떤 인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관객조차, 등장인물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구축한 세계다. 믿음은 허상이고, 관계는 계산이며, 감정은 연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은, 결국 그 게임 안에서 가장 능숙하게 거짓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영화의 결말에서 로이는 모든 걸 잃는다. 재산도, 명예도, 존재감도. 그는 스스로를 속는 자가 아닌 속이는 자라고 믿었지만, 결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착각, 바로 '자신이 절대 속지 않는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짜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지켜낸 베티다. 그리고 그 방식은, 슬프게도 진심이 아니라 완벽하게 설계된 ‘속는 연기’였다.

<굿 라이어>는 이처럼 냉정한 세상을 정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흐름은 있다. 더 이상 진심만으로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더 이상 믿음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속이는 자이고, 동시에 속는 자이기도 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 그것을 자각하고 준비했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