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 개봉일: 2023. 02. 09.
- 장르: 드라마
- 평점: 7.92
- 등급: 12세 이상 관람
- 러닝타임: 83분
- 감독: 길리스 매키넌
- 주연: 티모시 스폴, 필리스 로건
1. 혼자 여행 - 독립의 의미
영화 <라스트 버스(The Last Bus, 2021)>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소박한 영국 영화다. 고령의 남성이 유골함을 들고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최남단까지 이동하는 단순한 구조. 하지만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영화는 ‘혼자 떠나는 여정’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설정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고령 사회에 진입한 오늘날, 이 영화는 ‘노인’, ‘죽음’, ‘독립’, ‘기억’, ‘주체성’이라는 키워드를 새롭게 조명하며, 독립의 의미를 나이의 틀에서 해방시키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고령자를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60세 이후의 삶은 ‘의존성’과 ‘사회적 소외’를 상징하며, 이는 언론, 정책, 미디어 전반에서 거의 ‘전제 조건’처럼 묘사된다. 반면 <라스트 버스>는 이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서사를 택한다. 주인공 톰은 누구의 도움 없이 버스만으로 전국을 횡단한다. 교통수단의 선택조차 상징적이다. 버스는 일정한 노선과 시간을 따르는, 계획된 대중교통이다. 톰은 그 정해진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이는 ‘제한된 조건 속의 자율성’, 즉 현대 노년기의 현실적 독립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톰은 단지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편집자이자 서사자로 다시 태어난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했던 곳, 고향의 바닷가, 결혼사진을 찍었던 교회 등, 그는 과거의 ‘기억 지형’을 스스로 복원하며 그 위를 다시 걷는다.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는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덧씌우고, 다시금 삶을 재구성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이 회귀의 여정은 그 자체로 정체성과 주체성의 재구축이다. 이는 “누구와 함께 했는가”보다 “누가 결정했는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삼는 현대의 자율성 개념과 일치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침묵의 미학’을 유지한다. 톰은 말이 적다. 대사도 많지 않고,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절제된 연출은 관객이 그의 내면을 조용히 관찰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많은 관객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왜 이 길을 택했는지’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공감하게 된다. 특히 독립이라는 주제는 이 침묵 안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홀로 있지만 고립되지 않은 상태, 즉 외로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삶의 주체로 회복한 상태가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혼자'의 진짜 의미다. ‘동반자 없는 여정’은 흔히 상실의 상징처럼 보이기 쉽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성숙한 독립’의 표식으로 기능한다. 젊은 시절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지만, 노년기에는 자신과의 동행이 중요해진다. 영화 <라스트 버스>는 이 점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주인공의 마지막 길은, 타인과의 교류 없이도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 여정은 비관적 단절이 아닌, 자율적 마무리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단순한 개인 서사를 넘어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한국, 일본, 영국 모두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으로 분류되며, ‘고령자 삶의 질’은 이제 국가 정책에서 중요한 화두다. 하지만 ‘돌봄’과 ‘복지’ 중심의 담론은 때때로 노인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함정에 빠진다. 반면 <라스트 버스>는 노인을 능동적 주체로 묘사하며, 사회 속 독립적 개인으로 재해석한다. 영화 속 톰은 사회로부터 아무런 보조도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스스로 계획하고, 수십 번의 버스를 갈아타며 목적지에 도착한다. 육체적으로 약하고, 사회적 연결망도 없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보호받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개념과 연결된다.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가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나 복지 수혜자가 아니라, 경험을 가진 사회적 참여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스트 버스>는 이 액티브 시니어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형태로 보여준다. 노인은 연약하지만 무기력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수동적이지 않다. 그의 삶은 ‘마지막’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 즉, 죽음을 앞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닌, 인생을 스스로 정리하는 창조자의 모습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여정이 ‘버스’라는 교통수단을 통해 전개된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 속 여행은 자동차(개인적 자유), 기차(역사적 흐름), 비행기(극적인 변화)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버스’는 공공성과 지역성을 상징한다. <라스트 버스>에서의 이동은 자유로운 탈출이 아니라, 제한 속에서의 능동성이다. 그는 자신이 아닌, 버스의 시간표에 맞춰 움직여야 하며,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수동적으로 흐름에 탑승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주도권을 쥔다. 이는 바로 제한된 조건 속에서의 주체적 삶이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동성은 또한 기억과 연결된다. 톰은 지나는 장소마다 젊은 시절의 기억을 꺼낸다. 즉, 이동은 과거의 재현이자 현재의 재구성이다. 영화는 이 ‘이동’을 통해 ‘삶의 조각’을 하나씩 모아가는 퍼즐 맞추기처럼 연출하며, 관객에게 한 인간의 삶을 조용히 추적하게 만든다. 이 모든 장치들이 '혼자 떠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구성한다.
<라스트 버스>는 노인의 마지막 여정을 감성적으로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태도,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독립이라는 철학적 테마를 견고하게 쌓아간다. 동반자 없는 여정은 단절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 선택은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혼자의 가치’를 재조명하며, 혼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자유, 자기 성찰, 존엄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에서 연결되고, 함께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듣는다. 그러나 <라스트 버스>는 조용히 말한다. "가끔은 혼자 가는 길이 가장 인간적인 길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준 진정한 독립의 의미이며, 현대 사회가 마주한 고령화 시대에 꼭 필요한 시선이기도 하다.
2. <라스트 버스>의 고령자 얼굴
영화 <라스트 버스(The Last Bus)>는 고령의 남성이 영국 전역을 횡단하며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감정의 과잉 없이, 조용하고 담담하게 진행되지만, 시각적 연출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령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 그리고 이를 통해 생성되는 윤리적 감각이다.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서 노인을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두 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는 ‘코믹 relief’로서의 노인이고, 다른 하나는 ‘감동의 대상’으로서의 노인이다. 하지만 <라스트 버스>는 이러한 전형적인 구도를 철저히 배제한다. 대신, 관객이 노인의 삶 그 자체와 직면할 수 있도록, 얼굴을 중심으로 한 시각적 시선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 영화는 대사가 적고, 주인공의 표정도 최소화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침묵 속의 얼굴이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얼굴을 ‘타자의 윤리적 부름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소’라고 말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타인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인식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을 열어두는 윤리적 행위다. 바로 이 맥락에서 <라스트 버스>는 고령자의 얼굴을 카메라로 응시함으로써 관객에게 "당신은 이 삶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톰의 얼굴은 단순히 ‘늙은 외모’가 아니다. 그것은 세월의 누적, 잃어버린 시간, 그리움과 후회의 퇴적층이다. 피부의 주름, 입꼬리의 미세한 떨림, 눈동자의 흔들림은 말보다 더 풍부한 정서적 언어다. 영화 속 노인의 얼굴은 인간 존재 자체의 근원성과 시간성을 드러내는 ‘풍경’이다. <라스트 버스>의 클로즈업은 단순히 감정 전달이나 분위기 조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이는 응시를 통한 ‘응답의 윤리’ 구현이다. 일반적으로 클로즈업은 젊고 매끈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미적 장치로 쓰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네마의 시선을 고령자에게로 이동시키며, 우리가 자주 외면하는 얼굴을 ‘응시의 중심’에 둔다. 더 나아가 <라스트 버스>는 관객이 이 얼굴을 단지 ‘관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도록 유도한다. 감정을 직접 설명하거나, 대사로 안내하지 않는 방식은 관객에게 해석의 책임을 넘긴다. 이는 관객을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윤리적 참여자로 변모시키는 전략이다. 톰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의 삶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영화 속 카메라는 톰의 얼굴을 여러 각도와 조명으로 포착한다. 버스 창가에 앉은 옆모습, 대합실에서 고개를 숙인 상태, 거울을 응시하는 정면샷—all of these는 톰을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존재적 주체로 위치시킨다. 이는 '노인도 서사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영화 산업 내에서 노인은 종종 조연으로서 기능하거나, 젊은 인물의 서사적 전환점을 제공하는 장치로만 소비된다. 반면 <라스트 버스>는 그 노인의 얼굴을 중심 축으로 삼아 영화 전체의 리듬을 조율한다. 이 시선은 영화적 미학을 넘어서, 사회적 구조 속 고령자에 대한 시선 자체를 전복하는 행위다. 클로즈업된 얼굴은 동시에 영화의 리듬을 느리게 만든다. <라스트 버스>는 할리우드식 편집이나 감정의 급변을 철저히 거부한다. 카메라는 기다리고, 지켜보고, 한 인물의 느린 호흡에 맞춰 서사를 전개한다. 이 같은 연출 방식은 ‘노인의 삶의 속도’에 영화 전체를 동기화시키는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이 느림은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한 시간감각에서 벗어나 존재를 응시하게 한다. 시네마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는 "시간의 재구성"이다. <라스트 버스>는 그 시간 위에 노인의 얼굴을 얹는다. 천천히 변하는 표정,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 깊게 들이쉬는 숨—이 모든 것이 시간이자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는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침묵 속에서 웅변한다. 흥미롭게도 톰의 얼굴은 감정의 폭발이 없다. 울부짖지 않고, 웃지 않으며, 고통을 외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이 얼굴을 통해 가장 깊은 감정을 경험한다. 왜일까? 이는 바로 ‘감정의 비가시화’를 통한 진정성 회복이다. 요란한 감정 표현은 때로 소비되기 쉬운 콘텐츠로 전락한다. 반면 표정 없는 표정, 무언의 얼굴은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생산하게 만든다. <라스트 버스>는 톰의 얼굴에 감정을 '심어주기'보다는, 관객이 그 얼굴에 감정을 '투영하게끔' 만든다. 이는 감정의 자기화 과정이며, 동시에 시네마의 윤리적 수용 과정이다. 즉, 감동은 강요될 수 없고, 응시를 통해만 생성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구조를 얼굴을 통해 완성한다.
<라스트 버스>는 조용히 말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얼굴에 새긴 채 살아간다.” 이 영화가 택한 방법은 바로 그 얼굴을 영화의 중심 서사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윤리적 언어다. 누군가의 얼굴을 응시한다는 것은, 그의 삶과 고통, 기억과 침묵을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라스트 버스>는 노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감동적인 연출을 넘어서 삶에 대한 책임 있는 응시를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단순한 휴먼 드라마를 넘어서는 이유다. 그리고 이 미학은 오늘날 고령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묻는 중요한 윤리적 제안이기도 하다.
3. 느림의 힘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 영화는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는 매체로 진화하고 있다. 초당 컷 수가 늘어나고, 호흡은 빨라지고, 서사는 압축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라스트 버스(The Last Bus)>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노년의 인물 톰이 떠나는 버스 여행은, ‘느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 느림은 단순한 속도의 지연이 아니라, 영화적 구조와 의미를 전복하는 서사적 전환점이자, 윤리적 응시와 감정 몰입을 위한 깊이 있는 장치다.
톰의 움직임은 항상 느리다. 그가 버스 정류장에 다가가는 동작,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 앉아 숨을 고르는 호흡은 서사적 시간의 밀도를 바꾸는 장면들이다. 일반 영화에서는 '전개에 의미 없는 시간'이라 여겨질 수 있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는 중심에 자리한다. 바로 이것이 느림의 힘이다. 톰의 몸이 느려짐으로써, 관객은 그 ‘느린 시간’을 공유해야 하며, 그 시간 안에서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이 장면이 왜 중요한가?”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내러티브를 일방향적 전달에서 쌍방향적 사유의 장으로 변화시킨다. 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한 ‘시간-이미지(time-image)’ 개념과도 연결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고전적 영화는 운동을 중심으로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운동-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미지 영화는 운동이 중단된 상태, 혹은 지연된 상태에서 ‘지각’ 그 자체가 이야기가 되는 방식이다. <라스트 버스>는 바로 이러한 ‘시간-이미지’의 전형적인 예다. 톰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도착하는가', 더 나아가 '그 느린 이동 중 어떤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는가'이다. 이처럼 느린 몸의 영화는 관객에게 인물의 내면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철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현대 영화에서 감정은 주로 빠른 사건의 전환이나 극적인 대사, 음악 등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라스트 버스>는 그 반대다. 감정을 묘사하거나 유도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생성’하게 만든다. 톰이 길을 잃거나, 버스를 놓치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들—이 모두는 서사의 공백이 아니라 감정의 축적이다. 관객은 그 '빈 시간'을 함께 견디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입시키고, 결국 ‘공감’이라는 감정에 도달한다. 이러한 감정 구조는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나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과 같은 감독들이 즐겨 사용하는 반(反)감정적 서사 기법과 닮아 있다. 톤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 녹아든 슬픔과 회한은 훨씬 오래 남는다. 감동을 공급하는 대신, 사유를 요구하는 방식, 이것이 <라스트 버스>가 느린 속도를 통해 달성한 감정 전달 방식이다. 현대사회는 '속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한다. 빠르게 일하고, 빠르게 이해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면 느린 존재는 종종 '뒤처진 자'로 간주된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고령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느리게 걷고, 늦게 반응하며, 주변을 자주 멈춰 바라보는 노인의 움직임은 비효율적이고, 때론 방해물처럼 묘사된다. <라스트 버스>는 이 흐름을 완전히 뒤엎는다. 영화는 고령자의 느림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내러티브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톰의 느림은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경험이 농축된 속도다. 이 영화는 그 속도를 전면화함으로써, 관객의 인식 구조를 재편한다. 즉, 더 빠른 자가 더 유능한 존재가 아니라, 더 느린 자가 더 많은 기억과 감정을 지닌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 이 가능성을 수용하는 영화의 태도는 윤리적이며 정치적이다. <라스트 버스>는 플래시백 없이도 톰의 과거를 보여준다. 방법은 간단하다. 길게 응시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멈춰 서는 장면을 반복하는 것. 카메라는 그의 등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정면을 보여주고, 감정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을 담는다. 이 느린 시선은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인물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순간, 우리는 단지 장면을 ‘보는 것’을 넘어서, 인물의 시선을 ‘공유’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영화는 스토리텔링에서 사유의 미학으로 전환된다. 더불어 이 영화는 전형적인 3막 구조(도입–전개–결말)를 따르지 않는다. 톰이 떠나고, 이동하고, 도착하는 구조는 선형적이지만, 실제 감정과 기억은 중첩되고, 반복되며, 정체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지연된 감정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한 플롯 전개에서 벗어나, 인물의 내면 흐름에 집중하게 만든다.
<라스트 버스>는 노인의 느림을 연출상의 한계가 아니라, 서사적 도구이자 철학적 선언으로 전환시킨다. 톰의 느림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빠른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이 영화는 묻는다. “인생의 마지막 여정은 정말로 빠르게 끝내야 하는가?”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 “아니, 천천히 걸어도 좋다. 중요한 건 도착보다,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감정들이다.” 빠름과 정보 과잉의 시대에, <라스트 버스>는 고령자의 느림을 통해 삶의 진정한 리듬과 응시의 시간을 회복하게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