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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코리쉬 피자> 빈티지 패션, 퍼스트 러브, 아메리칸 드림

by borybory-click 2025. 11. 15.

영화 &lt;리코리쉬 피자&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22. 02. 16.
  • 장르: 멜로, 로맨스
  • 평점: 7.61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34분
  •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 주연: 알라나 하임, 쿠퍼 호프만

 

1. <리코리쉬 피자> 속 70년대 빈티지 패션

영화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과 함께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청춘들의 일상을 담아낸 작품으로, 시대적 감성과 분위기를 완벽히 재현한 점에서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패션이다. 이 영화에서 의상은 단순한 스타일링을 넘어, 캐릭터의 성격과 사회적 배경, 시대정신까지 반영하는 강력한 시각적 언어로 작동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일관되게 빈티지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현실감을 통해 관객을 70년대의 거리와 문화 한가운데로 이끈다.

먼저, 영화의 주인공인 알라나(알라나 하임 분)의 스타일은 70년대 젊은 여성의 자유로운 감성과 시대적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녀는 청바지와 민소매 탱크톱, 벨보텀 데님, 체크 셔츠, 오버핏 재킷 등을 입고 등장하는데, 이 모든 의상은 70년대 미국 서부 지역에서 유행했던 실용적이면서도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스타일을 따른다. 알라나의 옷차림은 완벽하게 코디된 느낌보다는 조금은 거칠고 즉흥적인 무드가 강한데, 이는 당시 젊은 세대가 가졌던 자율성과 비정형적인 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알라나의 복장은 시대의 흐름을 좇기보다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가 입는 멜빵바지와 레이어드 된 셔츠 조합은 단순한 귀여움을 넘어서 노동자 계급 출신의 실용성과 젊은 여성의 당당함을 함께 담고 있다. 또한 영화 내내 그녀가 보여주는 무심한 듯한 스타일링은 70년대 ‘내추럴 뷰티’와 ‘노메이크업 룩’이 각광받던 당시의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꾸미지 않은 듯한 룩은 당시의 히피 문화와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게리(쿠퍼 호프만 분)의 패션은 사춘기 소년의 서툰 성숙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옷차림은 세련됐다기보다는 실용적이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많다.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 가죽 재킷이나 스포츠 재킷, 때로는 슈트에 가까운 아이템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하면서도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중간 지점에 있는 캐릭터임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특히 슈트를 입고 등장하는 장면들은 단순히 패션 요소를 넘어, 당시 미국의 소년들이 꿈꾸던 자수성가와 성공, 어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서브 캐릭터들의 패션도 시대의 분위기를 충실히 반영한다. 교사, 배우, 정치인, 사업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옷은 모두 철저하게 7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의 지역성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구성되었다.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 넓은 칼라 셔츠, 브라운 계열의 와이드 팬츠, 짙은색 레더 재킷 등으로 스타일링 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남성복에서 유행했던 ‘남성다움’의 코드와 동시에 시대적 여유로움을 상징한다. 여성 조연들은 프린트 드레스, 스커트 슈트, 니트 카디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하게 연출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실루엣과 질감은 일상 속 인물들에 대한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영화 <리코리쉬 피자> 속 빈티지 패션은 단순히 ‘옛날 옷’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그 시대가 지닌 문화적 코드와 감정을 시각적으로 해석해 낸 결과물이다. 스타일링을 위해 일부러 만든 ‘복고풍’이 아니라, 시대를 실제로 살아가는 인물들의 피부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물로서 기능한다. 이는 오늘날의 빈티지 패션 트렌드와도 연결된다. 최근 몇 년간 Y2K 패션이나 90년대 미니멀리즘, 70년대 레트로 룩 등이 다시 주목받는 현상과 맞물려, <리코리쉬 피자>의 스타일링은 현대 관객에게도 충분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당시 패션과 밀접하게 연관된 청춘 문화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복원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1970년대는 청춘의 자유와 반항, 독립적인 개성을 패션으로 표현하던 시대였다. 이는 곧 ‘나를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옷’이 중요해진 시기였으며,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들이 패션 전반에서 활발히 일어났던 시대였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 같은 시대정신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인물들의 옷차림 하나하나가 단지 ‘예쁜 복장’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 성장 과정의 일면을 상징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리코리쉬 피자>의 스타일링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영화적 연출과 맞물려 더욱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때문이다. 조명, 카메라 워크, 색보정 등이 과하지 않고, 마치 오래된 필름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질감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의상의 색감과 소재가 더욱 리얼하게 전달된다. 헐렁한 데님 팬츠의 질감, 낡은 티셔츠의 주름, 니트 카디건의 짜임새 같은 디테일은 그 자체로 시대의 공기를 담고 있는 요소다. 이는 단순히 패션을 재현한 것을 넘어서, 그 시대 청춘들이 살아낸 감정과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복원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리코리쉬 피자>는 70년대 빈티지 패션을 단순한 미장센이 아닌 캐릭터 구축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며, 관객에게는 시간여행과도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패션은 영화 속에서 기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깊은 영향을 미치며, 단순한 배경 요소를 넘어서 그 자체가 이야기의 한 축이 된다. 특히 오늘날 패션에 관심 있는 관객들에게는 과거의 스타일이 어떻게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2. <리코리쉬 피자>와 퍼스트 러브의 진짜 의미

영화 <리코리쉬 피자>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복고풍 성장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관계의 흐름과 감정의 결은 그 어떤 현대 청춘 영화보다도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특히 이 작품은 첫사랑이라는 테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사실적인 퍼스트 러브의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미묘한 거리감, 타이밍이 엇갈리는 관계,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가는 혼란스러움은 <리코리쉬 피자> 속 게리와 알라나의 관계를 통해 생생히 전달된다.

퍼스트 러브는 흔히 첫 연애, 혹은 첫사랑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첫사랑은 반드시 연애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종종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시작되지 않은 사랑’으로 마음속에 더 강렬하게 남는 경우가 많다. <리코리쉬 피자>는 바로 그런 관계를 그린다. 게리는 열다섯 살, 알라나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를 두고 서로를 알게 되며, 그들의 관계는 명확한 사랑의 형태로 규정되기보다는 상황과 감정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모양을 바꾸어 간다. 영화는 이 둘 사이에 어떤 명확한 로맨틱한 선언이나 관계의 규정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상황 속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질투하고, 함께 있다가도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반복적인 흐름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실제로 경험했던, 혹은 지나쳐버렸던 첫사랑의 감정과 매우 닮아 있다. 단순히 설레거나 짜릿하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 동시에 답답하고, 낯설고, 슬프기도 하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리코리쉬 피자>는 바로 그런 불완전한 감정의 총합을 진짜 첫사랑의 감정으로 그리고 있다. 게리는 어른인 척하면서도 여전히 소년의 감정을 가진 인물이고, 알라나는 겉으로는 성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미성숙함과 혼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둘은 서로를 통해 각자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며, 그것이 연애인지, 우정인지, 혹은 가족적 애착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이 둘의 관계를 보며 분명한 첫사랑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이들이 나누는 감정이 ‘처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충실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퍼스트 러브란 누군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상대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처음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게리는 알라나를 좋아하면서 자립심을 키워가고, 어른이 되고자 한다. 알라나는 게리라는 존재를 통해 자기 삶의 방향성과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즉, 이들의 퍼스트 러브는 단순한 감정선이 아니라, 자아 발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관계의 단어를 쉽게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 우정, 호감, 집착, 관심, 질투, 헌신 등이 뒤섞인 이 미묘한 감정들은 극 중에서 단순화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이 영화의 감정선은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이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듯, 영화 속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혼란은 곧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첫사랑을 판타지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화들이 퍼스트 러브를 낭만적 결말이나 이상화된 감정으로 포장하는 것과 달리, <리코리쉬 피자>는 첫사랑의 실제적인 본질을 조명한다. 관계가 어긋나고, 감정이 오해되고, 잘 맞을 것 같다가도 금세 틀어지고, 가까워지다가도 멀어지는 과정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감정의 실체를 천천히 마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감정의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퍼스트 러브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다. 한쪽은 간절할 때 다른 한쪽은 무심하고, 다시 감정이 맞닿을 무렵엔 상황이 변해 있다. <리코리쉬 피자> 속 게리와 알라나의 관계는 끊임없이 타이밍이 어긋난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야말로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된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이상적이고,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더 생생하며, 정의되지 않았기에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영화 속 첫사랑은 시대적 배경과도 맞물려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격변, 문화적 개방성이 혼재한 시기. 그런 환경 속에서 청춘들이 느끼는 감정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시기 전체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청춘의 중심에는 늘 ‘누군가를 처음으로 마음에 품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게리와 알라나가 끝내 연인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발견했고, 상대를 어떻게 기억하게 되었는가 다. 그것이 바로 퍼스트 러브가 지닌 진짜 의미다. 누군가를 좋아했던 그때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남기 때문이다.

결국 <리코리쉬 피자>는 퍼스트 러브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되었지만 끝나지 않았고, 마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가까이 있었지만 완전히 닿지는 못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되묻는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겪었던 첫사랑의 모습과 가장 흡사할지도 모른다. 화려한 고백이나 극적인 결말 없이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사랑. <리코리쉬 피자>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3. 아메리칸드림의 재해석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리코리쉬 피자>는 겉으로 보기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단순한 성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당대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분위기, 청춘의 도전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오래된 신화를 비틀고 재구성하는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단순히 감성적인 복고 영화로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공간, 인물들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현실에서 변형되고 있는지를 날카롭지만 유쾌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게리는 단지 한 명의 캐릭터가 아니라, 70년대 중산층 백인 청소년들이 가졌던 자기 확신과 욕망의 집합체다. 그는 15세라는 나이에 이미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사진을 찍히는 아역 배우로 돈을 벌며, 이후에는 침대 매트리스 판매, 물 침대 사업, 피자 가게 창업까지 연이어 도전한다. 그의 에너지 넘치는 행동력은 전형적인 아메리칸드림의 서사와 유사하다. 즉, 기회를 포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려는 태도. 이는 미국이 오랫동안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주입해 온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상이다.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는 이 전형적인 성공 신화를 비판적으로도 바라본다. 게리의 사업은 대부분 지속되지 못하고, 늘 새로운 기회만을 쫓는다. 물 침대 사업은 급작스런 단속과 시장 변화로 위기를 맞고, 피자 가게도 안정적인 수익 기반보다는 즉흥적인 아이디어에 가까운 창업이다. 이런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이 단지 근면과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더 복잡하고 불안정한 이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게리는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불안감과 조급함이 배어 있다. 게리의 태도는 일종의 ‘성공 강박’을 반영하기도 한다. 아직 어리지만, 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물질적 성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미국 사회의 경쟁 중심 사고를 상징한다. 청소년기부터 ‘성공’이라는 이름의 경주에 내몰리는 현실은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에 놓인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를 아주 세심하게 그려내며, 드림이라는 말속에 담긴 허상을 폭로한다. 한편, 영화 속 알라나의 서사는 이와 대조를 이룬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여전히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으며, 직업적 목표나 방향성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게리의 세계와 처음에는 거리를 두던 그녀가 점점 게리의 사업에 함께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모색하는 과정은 또 다른 형태의 아메리칸드림을 떠올리게 한다. 알라나의 여정은 확고한 목표가 없어도 삶을 개척할 수 있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보다 유연한 가치관을 반영한다. 흥미로운 점은 알라나가 거치는 직업과 사람들의 면면이다. 정치인, 사진사, 매니저, 교사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점점 깨닫는다.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아메리칸드림, 즉 일확천금을 꿈꾸는 직선적 성공의 길에서 벗어난 자아 탐색의 여정을 상징한다. 그녀의 여정은 ‘성공’보다는 ‘이해’에 가까운 목표를 지향하며, 이는 현대 사회가 꿈꾸는 새로운 드림의 방향성과 닿아 있다. 또한 영화는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를 단순한 향수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일 쇼크, 닉슨 행정부의 몰락, 문화 산업의 변화, 청년 실업 등의 당시 사회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분위기와 맥락은 영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과 트렌드에 휩쓸리도록 만들며,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아메리칸드림이 얼마나 부유하고 위태로운 신화로 작용하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게리가 일으키는 여러 사업이 너무 쉽게 시작되고, 너무 쉽게 사라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성공 서사의 허술함이 드러난다. 리코리쉬 피자는 결코 성공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는 청춘의 모습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성공 = 행복’이라는 도식을 전면적으로 의심한다. 게리는 성공을 좇지만 늘 외롭고, 알라나는 방향 없이 떠돌지만 어느 순간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두 인물이 교차하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은 진짜 꿈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이처럼 <리코리쉬 피자>는 아메리칸드림을 단순히 부정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개념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전통적인 성공 서사 대신, 변화하는 감정, 성장의 곡선, 불완전한 시도들을 통해 삶을 그리는 방식으로 꿈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평등한 희망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다원적 삶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시대와 문화를 넘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대적 드림의 메시지다.

결론적으로 <리코리쉬 피자>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전통적 의미를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영화는 그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캐릭터들의 선택과 행동, 실패와 감정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전달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꿈을 되돌아보게 되고, 아메리칸드림은 더 이상 특정한 성공의 형태가 아닌, 저마다의 서사를 품은 다채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