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 2014. 01. 09.
- 장르: 코미디, 드라마
- 평점: 8.52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87분
- 감독: 디데릭 에빙어
- 주연: 톤 카스, 르네 반트호프
1. <마터호른>의 유머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직접적인 유머 코드다. 대사 속 농담, 과장된 행동, 타이밍을 절묘하게 살린 슬랩스틱 같은 전형적 장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간접적이고 은근한 방식이다. 상황 자체가 웃기거나, 인물 간의 어색한 공기가 유머로 전환되는 경우다. 전자는 빠르고 직관적이지만, 후자는 느리면서도 오래 남는다. 그리고 영화 <마터호른(Matterhorn, 2013)>은 바로 이 두 번째 범주의 유머를 가장 섬세하고, 정직하게 다룬 작품 중 하나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웃기 위해 본 게 아니었다. “네덜란드 시골 마을의 중년 남성 이야기”라는 소개 문구만으로는 도저히 웃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주 피식 웃게 됐다. 어떤 장면에서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혼자 낄낄거리기도 했다. 분명 웃기지도 않은데 웃기고, 아무도 웃으라고 하지 않는데 웃음이 나는 그런 감정. 바로 그 미묘함이 <마터호른>의 유머다. 주인공 프레드(Fred)는 평생을 규칙적으로 살아온 남자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며, 자신의 일상 루틴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며 살아간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벤이라는 이름도, 과거도, 말도 없는 남성이 그의 집 앞에 나타난다. 프레드는 처음엔 그를 경계하지만, 곧 그를 집에 들인다. 그리고 둘의 동거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수많은 웃음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웃음은 이상할 정도로 절제돼 있다. 벤이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프레드가 당황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웃는다. 하지만 이건 대놓고 웃기려고 만든 장면이 아니다. 카메라가 인물들의 표정을 고정한 채 담담히 따라가고, 대사도 없다. 이 어색하고 조용한 공기가 오히려 웃음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과하게 해석하지 않고, 현실감 있게 그려내는 방식에서 오는 유머는 관객의 ‘긴장’을 풀게 만들며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도한다. <마터호른>의 유머는 기본적으로 ‘관찰적 유머(observational humor)’다. 이건 등장인물의 행동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상황 자체가 지닌 어색함과 충돌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프레드가 벤에게 규칙을 가르치려고 무표정한 얼굴로 “식사는 정확히 12시, 기도는 오전 7시”라고 반복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그 과도한 진지함에서 웃음을 느낀다. 그런 생활 규칙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치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다. 이 서로 다른 기준이 충돌할 때 우리는 인간의 진지함이 지닌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그 아이러니는 때로 눈물보다 강력한 웃음을 만든다. 이 영화의 유머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작용한다. 바로 ‘사소한 반항’에서 비롯되는 쾌감이다. 프레드는 규칙적인 일상을 고수해 왔고, 교회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늘 신경 쓰며 살아왔다. 그런데 벤과 함께하면서부터 그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함께 외출하고, 햄버거를 먹고, 여행을 떠난다. 그 변화가 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지만, 그 소소한 일탈이 쌓이면서 우리는 웃게 된다. 왜냐하면 그 반항이 너무 소심하고,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정색하며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라고 선언하는 대신, 그냥 조용히 함께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프레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웃기고 또 뭉클하다. <마터호른>은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유쾌한 전개를 예고하지도 않고, 웃음 포인트를 크게 부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너무나 특별한 방식으로 관객을 웃게 만든다. 우리가 웃는 이유는 단순히 장면이 재밌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이 너무 현실 같고, 그 인물들이 너무 솔직하며, 우리 삶의 어딘가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웃게 되는 영화”다. 상황의 리듬이 웃음을 유도하고, 인물의 표정이 웃음을 이끌며, 과장 없이 일상을 보여주는 그 방식이 웃음을 남긴다. 이런 유머는 검색엔진 알고리즘이 감지하기엔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블로그나 영화 리뷰는 <마터호른>을 "감동적인 드라마", "소외된 인간의 연대", "종교와 관용의 이야기"로만 요약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 이 영화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섬세한 힘을 가진 작품이다. 그것도 결코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웃음을 팔지 않고, 웃음을 허락하지도 않으면서 관객에게 은밀하게 웃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영화.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의 유머는 ‘일상 속의 놀라움’과 ‘진지함의 반전’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 영화는 유머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더 편안하게 전달한다. 벤이라는 인물이 사실상 사회적 기준에서 보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말도 없고, 행동도 예측 불가능하고, 과거도 모호하다. 그러나 그가 프레드의 삶에 들어왔을 때, 관객은 그 낯섦을 웃음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익숙해진다. 그 웃음은 차별이나 조롱이 아니라, 관계가 맺어질 수 있다는 신호다. 즉, 유머는 여기서 관계의 시작이 된다. 프레드와 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만들어지는 작은 반복 장면들, 예를 들어 나란히 걷는 모습, 식사하는 순간, 어깨를 살짝 부딪히는 리듬 같은 것들은 유머와 동시에 따뜻함을 함께 준다. 관객은 그 리듬 안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은 무의식적인 웃음으로 연결된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대사를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들의 유대감과 감정의 변화를 웃음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터호른>의 유머는 삶의 이면에서 건져 올린 감정이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 웃음 안에는 공감, 위로, 수용, 해방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터호른>은 단순히 ‘웃긴 영화’가 아니라, ‘웃으며 울게 되는 영화’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오랫동안 떠올리게 되는 장면들은 아마도 가장 조용한 순간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햄버거를 먹는 장면, 벤이 피아노를 치고 프레드가 멀찍이 바라보는 장면, 교회에서 벤을 변호하듯 입을 여는 프레드의 짧은 말. 그 모든 순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소리 내어 웃든, 마음속으로 웃든, 우리는 이 영화와 함께 한참을 웃게 된다. 그리고 그 웃음 덕분에 영화 속 인물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의 삶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게 바로 <마터호른>의 유머가 특별한 이유다. 웃고 나면 가볍지 않고, 오히려 더 따뜻하고 진지해진다. 말 한마디 없이도 웃을 수 있고, 웃음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영화는 흔치 않다. 그래서 <마터호른>은 조용히, 하지만 아주 강하게 관객의 마음에 남는다.
2. <마터호른> 속 틀을 깬 유머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가족과 함께 사는 일, 친구와의 자취, 결혼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생각보다 엄격하다. 성별, 나이, 관계, 혈연, 법적 유대 같은 것들이 동거의 전제처럼 여겨진다. 그런 기준 속에서, 영화 <마터호른(Matterhorn)>이 보여주는 동거는 너무나 낯설고, 동시에 너무나 따뜻하다.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예측 불가능한 동거를 다룬다. 한 명은 프레드, 규칙적이고 보수적인 삶을 살아온 중년의 남성이고, 다른 한 명은 벤, 말도 없고 정체도 모호한 떠돌이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고,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함께 살기 시작한다. 대사로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계약서나 혈연, 의무도 없다. 단지,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씩 쌓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동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다. 프레드는 처음부터 벤을 환영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따갑고, 교회 공동체 역시 그들의 동거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프레드는 벤에게 방을 내어주고, 식사를 나누고, 때로는 벤을 아이처럼 돌본다. 그 시작은 동정이나 책임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프레드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의 변화가 묻어난다. 거기에 명확한 정의는 없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함께 사는 방식’에는 정해진 공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동거는 매우 비언어적이다. 두 사람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벤은 말을 하지 않고, 프레드는 짧은 명령조로만 말한다. 하지만 그 사이의 공기는 점점 따뜻해진다. 예를 들어 프레드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식사하며 지키던 모든 규칙이, 벤과 함께하면서 조금씩 느슨해진다. 햄버거를 먹으며 외식을 하고, 동네를 벗어나 여행을 떠난다. 벤이 보여주는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가 프레드의 삶을 변화시키고, 프레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건 단순한 ‘돌봄’의 서사가 아니다.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터호른의 동거는 ‘틀’이라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동거를 생각할 때, 법적 관계나 경제적 필요, 또는 연애나 혈연 같은 명확한 명분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전제를 거부한다. 아무 명분 없이도, 아무 조건 없이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관계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의무가 되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건 굉장히 낯설고 새로운 방식의 관계다. 또한 이 영화는 타인의 시선에 저항하는 동거를 그린다. 마을 사람들은 프레드와 벤의 관계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어떤 이는 그들의 동거를 동성애적 관계로 해석하고, 또 어떤 이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벤을 ‘집에 들인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프레드는 끝까지 그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벤과의 동거를 ‘정상’의 범주 안에 끼워 넣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한다. 함께 살아보니 나쁘지 않았고, 벤이 곁에 있으니 외롭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태도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마터호른>이 특별한 이유다. 이 영화는 동거를 통해 ‘정상’이라는 사회적 개념을 해체한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이상한지를 규정짓는 기준 자체에 물음을 던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은 꼭 정해진 조건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나이나 성별이 달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연결이 없어도,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영화는 조용하게 제시한다. 동거라는 개념은 사실상 ‘삶의 공유’다. 음식을 함께 먹고, 일상을 나누고, 감정을 교환하고, 때로는 침묵을 나누는 일이다. 마터호른은 바로 이 지점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벤이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의 긴장감, 서로 식사를 하며 만들어지는 리듬, 무심하게 창밖을 함께 바라보는 순간 등은 대사 없이도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눈에 띄게 크거나 극적이지 않다.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감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동거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프레드는 점점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는다. 과거에 아들을 잃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벤을 통해 다시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감사나 구원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이다. 벤이라는 인물은 프레드에게 어떤 새로운 감정적 문을 열어준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벤이 아니라, 함께 살아낸 ‘시간’ 그 자체다. 이 영화는 그 시간을 통해 서서히 변화하는 인간의 마음을 아주 천천히, 섬세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틀을 깬 동거’를 통해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꼭 연애가 아니어도, 가족이 아니어도,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반드시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낀다. 이건 현대 사회에서 점점 관계가 파편화되고, 연결이 조건화되는 상황 속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의 본질은, 그 사람과 법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있다.
<마터호른>은 이러한 동거의 새로운 정의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의는 정말 당신 스스로의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든 틀에 불과한가? 이 영화는 그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마음에 남긴 채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오래 남는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 말이 통하지 않아도, 과거를 모르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존재든 간에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마터호른>은 그 믿음을 가장 조용하고 진심 어린 방식으로 전해준다. 그리고 그 동거는,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3. 진심의 속도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감정이 폭발하거나, 대사 한 줄이 가슴에 남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말도 없고, 움직임도 느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서 그 정적이 나를 멈추게 만든다. 네덜란드 영화 《마터호른》(Matterhorn)은 그런 순간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과장도, 강요도 없이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진심은 어떤 속도로 움직이나요?"
마터호른은 빠른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선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극적인 사건 전개보다 '정서의 흐름'이 중심에 놓여 있다. 등장인물 프레드와 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대화가 없어도, 표정이 그리 풍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의 감정선이 느리게 변화하고 있음을 천천히 알아챈다. 이 ‘느림’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미학이다. 진심은 천천히 다가오고, 관계는 빠르게 맺어지지 않으며, 신뢰는 시간을 통과해야만 자리 잡는다. 주인공 프레드는 전형적인 ‘정돈된 삶’을 살아가는 중년 남성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도하고 식사하며, 교회와의 관계에 따라 행동을 정돈한다. 그의 삶은 규칙 그 자체다. 그런데 이런 규칙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이게 맞는 삶이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니까’라는 외부 기준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감정은 억눌려 있고, 인간관계는 차단되어 있다. 그 규칙적 일상은 안정이라기보단, 외로움과 상실을 감추기 위한 방어막처럼 보인다. 이런 프레드의 삶에 벤이 갑자기 등장한다. 말도 못 하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며, 정체불명의 남자다. 프레드는 망설이면서도 그를 집에 들인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벤이 무엇을 원하는지, 프레드가 왜 그를 받아들이는지, 이들의 관계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단순한 동작, 반복되는 일상, 간헐적인 눈빛 교환으로 '정서의 변화'를 그려나간다. 현대 사회는 '속도'를 강조한다. 사랑도, 우정도, 직장 내 관계도 가능한 한 빠르게 친해지고, 적응하고, 정리를 요구한다. 하지만 마터호른은 그 모든 속도에 반기를 든다. 이 영화에선 감정이 움직이는 데 한참이 걸리고, 친밀감은 자연발생적인 사건처럼 조용히 피어난다. 프레드는 벤을 의심하고, 불편해하며, 혼자 남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차가운 거리감은 식사를 나누고, 하루를 함께 보내는 과정 속에서 아주 천천히 녹아간다. 이 변화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험' 자체가 변화를 만든다. 프레드는 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벤 역시 자신을 포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말로 연결되지 않아도, 정서가 이어지고, 관계가 자라나는 이 구조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자연스러운 유대'를 상기시킨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감정이 ‘성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진심을 증명해야만 관계가 깊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프레드와 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걷고, 먹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이 곧 ‘진심의 증거’가 된다. 말보다 행동이, 설명보다 침묵이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이런 영화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빠름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 속에서 느림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마터호른에서 프레드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틀을 깨기 시작한다. 벤이라는 타인의 존재는 프레드에게 일종의 '거울'이 된다. 벤은 말하지 않지만, 프레드가 무심코 했던 말이나 습관들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다르게 반응하며 그의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벤은 프레드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프레드는 그 존재감에 천천히 반응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이 영화는 ‘관계가 사람을 바꾼다’는 진부한 메시지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프레드가 벤을 받아들이는 것도, 벤이 프레드를 바꾸는 것도 모두 비의도적이다. 우리는 변화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변화가 일어나는 그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게 된다. 변화가 '의도' 없이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마터호른이 보여주는 관계의 본질이다. 이러한 비서사적 감정 전개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명확한 동기, 갈등, 해결 구조를 기반으로 감정을 해설한다. 그러나 마터호른은 감정을 해설하지 않고 보여준다. 프레드의 눈빛 하나, 벤의 기묘한 미소 하나가 모든 감정을 대변한다. 이 느린 감정의 시간은 관객에게도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만든다. 벤과 프레드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일종의 가족 같은 형태로 발전한다. 누군가는 이 동거를 퀴어 관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너무 쉽게 이름 붙이는 그 감정들이 사실은 훨씬 복잡하고 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드는 과거에 아들을 잃었고, 그 상처는 오랫동안 그를 고립시켜 왔다. 벤과의 조용한 시간은 그가 잊고 지냈던 ‘감정의 여백’을 회복하게 만든다. 그는 벤에게서 아들을 보기도 하고, 친구를 느끼기도 하며, 돌봄과 돌봄 받음 사이를 오간다. 그 복잡한 감정의 층위는 오직 ‘시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정서적 설계다. 마터호른은 빠르게 공감하거나, 바로 이해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서두르지 않고, 관객에게도 같은 리듬으로 감정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처음엔 지루할 수 있지만, 다 보고 나면 오래 남는다. 잔잔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감정의 무게가 스며들기 때문이다. 마터호른은 마터호른은 감정을 느리게 전개하는 영화일 뿐 아니라, 느리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위한 찬가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진심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을 열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긴 시간이 지나야 가까워진다. 중요한 것은 그 속도를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다. 마터호른은 그 기다림의 가치, 그리고 그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도 쉽게 평가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 담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오히려 이 영화의 힘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너무 조용해서 들리지 않았던 감정의 움직임. 진심은 원래 그렇게 작고, 느리게 움직인다. 그것이 진짜 감정의 속도이고, 마터호른은 그 속도를 가장 아름답게 포착해 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