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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몬스터 콜>괴물과 나무, 12시 7분, 괴물의 눈빛

by borybory-click 2025. 6. 20.

영화 &lt;몬스터 콜&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7. 09. 14.
  • 장르: 드라마, 판타
  • 평점: 8.58
  •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8분
  •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 주연: 루이스 맥더갤, 시고니 위버, 팰리시티 존스, 리암 니슨

 

1. <몬스터 콜>의 괴물과 나무

영화 <몬스터 콜>을 보면 이 작품이 단순한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죽음을 마주한 한 소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시각화한 작품이며, 그 중심에 ‘괴물’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있다. 그러나 이 괴물은 일반적인 괴물과는 다르다. 거칠고 무서운 외형과는 달리, 그는 소년 코너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와 시간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안내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괴물이 나무, 즉 ‘주목(tree of yew)’이라는 형태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이 자연물은 영화의 감정 구조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핵심적인 상징으로 작용한다.

주목나무는 영화에서 괴물의 본질이다. 이 거대한 나무는 코너의 방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고, 매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코너 앞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나타난다. 많은 판타지 영화에서 나무는 생명, 지혜, 혹은 신성한 연결의 매개체로 등장해 왔다. 하지만 <몬스터 콜>에서의 나무는 치유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단순히 코너가 두려움을 이겨내는 수단이 아닌, 감정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함께하는 존재다. 주목은 실제 약용식물로도 쓰이는데, 항암 성분이 있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병과도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영화는 자연물을 통해 치유라는 주제를 다층적으로 풀어낸다. 괴물이 나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감정적 무게를 자연과 연결 짓는 방식이기도 하다. 코너는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슬픔, 분노, 혼란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 순간, 인간이 아닌 나무의 형상을 한 괴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자연의 침묵과 묵직한 존재감처럼, 코너의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때때로 인간이 아닌 자연을 통해 더 깊이 전달된다. 나무는 그런 점에서 완벽한 상징이다. 괴물은 코너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들은 겉으로는 동화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도덕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선한 왕자가 진실을 가리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 이야기는 위선을 내세운 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코너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이야기들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나무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설명이나 충고가 아니라, 코너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감정의 거울이다. 즉, 나무는 이야기를 통해 감정적 정화(catharsis)의 통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설정은 치유심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과 맞닿아 있다. 심리 치료나 예술치료에서는 '상징'을 통해 감정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몬스터 콜>은 나무라는 자연물이 소년의 감정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괴물은 코너에게 감정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우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코너 스스로 진실에 다가가도록 유도한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천천히 직면하게 만드는 과정이며, 치유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자연물의 상징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한, 영화는 시각적으로도 자연의 무게를 강조한다. 괴물이 처음 나타날 때, 그의 등장과 함께 주변의 뿌리가 땅을 뚫고, 가지가 창문을 넘고, 돌출된 나뭇가지들이 현실을 침범한다. 이는 자연이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주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괴물이 매번 등장할 때마다 주변 환경이 흔들리고, 코너의 감정도 함께 요동친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과 감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시청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주는 장치이다. 주목의 상징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더욱 또렷해진다.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고, 코너는 마침내 네 번째 이야기, 즉 자신의 이야기를 괴물 앞에서 털어놓게 된다. 이 순간, 괴물은 이전보다 더 크게, 더 어두운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연민과 포용을 드러낸다. 그는 코너를 벌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인정해 주며 안아준다. 나무는 흔히 오래도록 서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일까. 괴물은 그 감정의 무게를 오랜 시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존재. 이 속성은 인간관계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본질과도 닮아 있다. 코너의 마지막 감정 해방 장면에서 나무 괴물은 다시 한번 등장하며 그를 지켜본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어떤 말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침묵, 괴물의 눈빛, 그리고 코너의 울음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감정을 전한다. 이 부분은 말보다 더 강한 치유의 힘이 ‘존재함’ 그 자체에서 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괴물은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어준다. 이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몬스터 콜>에서 괴물이 나무라는 점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전하려는 ‘치유란 말보다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시각화한 상징이다. 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곁에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때로 우리가 감정을 치유받는 방식은 누군가의 조언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주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괴물이 나무인 이유는 그래서 가장 정직하고도 깊은 선택이다.

 

2. <몬스터 콜> 속 12시 7분

영화 <몬스터 콜>은 단순히 한 아이가 괴물을 만나는 판타지 영화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 작품은 판타지적 요소를 빌려 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정서적 서사다. 영화 전반에서 관객을 가장 반복적으로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12시 7분’이라는 시간이다. 괴물이 매번 등장하는 그 시각, 즉 자정을 막 넘긴 시간에 어떤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단순한 설정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시간 반복 구조는 사실 영화의 주제, 구조, 감정의 흐름 모두와 맞물려 있다. 12시 7분은 이 작품의 감정적 중심축이자 철학적 장치다.

우선, 시간의 상징성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자정은 전환점으로 사용된다. 자정은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다. 죽음과 삶, 현실과 환상,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겹쳐지는 시간이다. <몬스터 콜>은 이 상징적인 시간을 7분 넘긴 시점으로 설정했다. 이 7분은 단순한 추가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예정된 시간에서 조금 늦은 감정의 폭발’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코너는 어머니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의 마지막 문턱에서 망설인다. 그는 자정을 넘긴 후에야 괴물과 마주하며, 자신 안의 진실을 서서히 직면한다. 이 7분은 그 망설임의 여백이자, 감정의 틈이다. 12시 7분은 반복되는 시간이다. 매일 같은 시각에 괴물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반복은 단조로운 반복이 아닌, 감정의 층위가 변화하는 내면의 여정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괴물의 등장에 놀라고 두려워하던 코너는 점차 이 시간대를 기다리고, 마침내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12시 7분은 감정의 훈련장 같은 역할을 한다. 매일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코너는 점차 두려움을, 혼란을, 죄책감을,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반복은 단순한 순환이 아닌, 성장의 반복인 셈이다. 시간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구조는 영화 전체의 리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인 판타지 영화가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 구조라면, <몬스터 콜>은 반복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통해 감정의 점진적 고조를 유도한다. 12시 7분이라는 고정된 지점이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시간대는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현실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로 인해 12시 7분은 그 자체로 감정의 파열이 일어나는 ‘의식적 시공간’이 된다. 마치 고대 신화 속 의식처럼, 이 시간에만 허용되는 감정과 환상이 작동하며, 영화는 이를 통해 감정의 축적과 해방을 반복한다. 또한, 이 시간은 주인공 코너의 내면적 시계를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코너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한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 분노, 심지어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죄책감까지 모두 밀어낸다. 하지만 12시 7분마다 나타나는 괴물은 그 감정들을 직면하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 시각은 외부 세계의 시간이 아니라, 코너의 심리적 시간이다. 사람마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다르듯, 코너는 자신만의 시계로 감정을 정리하고 직면하는 과정을 겪는다. 12시 7분은 그가 감정적으로 ‘열리는’ 유일한 시간이다. 영화 속에서 괴물은 정확히 이 시각에만 나타난다. 그는 무작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치유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반복과 노력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흔히 감정의 치유를 갑작스러운 계기나 누군가의 한마디에서 찾으려 하지만, <몬스터 콜>은 매일 같은 시간에 반복적으로 자신과 마주해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괴물이 12시 7분에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코너 스스로 감정을 소환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시간이다. 또한, 이 시간은 영화의 시각적 리듬을 분할하는 기능도 한다. 낮에는 현실의 압박이 있다. 어머니의 병, 학교에서의 괴롭힘, 조부모와의 거리감. 하지만 12시 7분이 되면 배경은 어둡고도 마법적인 세계로 전환된다. 괴물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나무는 생명을 얻고, 색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단순한 판타지 연출을 넘어, 감정의 진폭이 가장 극대화되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장치다. 어둠은 단절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공간이며, 12시 7분은 그 해방의 출구이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 시간은 인간이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틈’을 의미한다. 하루를 지배하는 사회적 시간에서 벗어난 틈. 학교도, 가족도, 규칙도 멈춘 시간. 괴물이 등장하고 코너의 감정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은 논리보다 감정이 우선되는 ‘비이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철학자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개념처럼, 이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으로 농축된 시간이다. 짧지만 밀도 높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 순간이며,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은 시간이다. 결국 <몬스터 콜>에서 12시 7분은 단순한 영화 속 설정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움직이는 리듬, 치유가 반복되는 형식, 고통을 직면하는 용기의 시간이다. 관객은 이 시간을 통해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괴물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환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현실적인 설정이다. 감정이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정해진 틀 안에서도 천천히 감정을 끌어안고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몬스터 콜>은 이처럼 반복되는 시간 하나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매일 밤 찾아오는 괴물은 우리가 외면했던 감정, 억눌렀던 진실, 꺼내지 못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 바로 12시 7분은 그 모든 감정의 기폭제가 된다. 우리는 모두 하루 중 단 몇 분간,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몬스터 콜>은 그 시간을 영화적으로 아름답고 철학적으로 담아냈다.

 

3. 괴물의 눈빛

영화 <몬스터 콜>에서 괴물은 단순한 상상 속 존재가 아니다. 그는 주인공 코너의 감정, 두려움, 분노, 그리고 깊은 내면의 진실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존재다. 하지만 이 괴물이 관객에게 두렵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핵심은 바로 괴물의 ‘눈빛’에 있다. 인간의 얼굴이 아닌 나무의 형상을 가진 거대한 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때로 인간보다 더 진한 감정을 전달한다. 이 글에서는 <몬스터 콜> 속 괴물 캐릭터의 눈빛 연출을 중심으로,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고 공감을 이끌어냈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해 본다.

괴물은 처음 등장할 때, 코너의 방 창문 너머로 거대한 나무의 형상으로 솟아오른다. 그의 몸은 나무껍질과 뿌리로 이루어져 있어 외형상 차갑고 단단한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카메라는 등장 직후 곧장 괴물의 얼굴,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을 클로즈업한다. 그 눈빛은 놀랍도록 섬세하다. 분노, 안타까움,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심이 담겨 있다. 처음 보는 이 괴물의 눈빛에서 관객은 두려움보다도 먼저 ‘어떤 감정적인 이유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낀다. 이 연출은 괴물에 대한 관객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장치다. 영화에서 괴물의 눈빛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효과가 아니다. 그는 리암 니슨의 목소리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지만, 눈빛은 캐릭터의 ‘감정 중심’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특수 효과팀은 괴물의 눈을 의인화하면서도 자연물의 일부처럼 보이게 처리했다. 그의 눈동자는 인간처럼 움직이고 초점을 맞추며, 감정의 세기에 따라 밝기나 색감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특히 코너가 두려워하거나 울분을 토할 때, 괴물은 그의 감정에 동조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이때 괴물은 말보다 눈빛으로 코너를 위로한다. 이는 시청자에게 ‘괴물은 감정을 이해하는 존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연출이다.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두 번째 이야기 이후, 코너가 학교에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친구를 폭행하고 난 직후 괴물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이때 괴물은 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는 책망하지 않고, 코너의 눈을 천천히 응시하며 감정의 파장을 받아낸다. 눈빛은 대사가 아닌 감정의 응답으로 기능하며, 코너가 내면의 고통을 점차 드러내는 데 중요한 촉매제가 된다. 이 장면에서 괴물의 눈빛은 이해와 연민이 교차된 감정의 결정체로 표현된다. 또 다른 핵심 장면은 영화 후반부, 코너가 병원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장면이다. 코너는 괴물에게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를 고백하게 되고, 이는 곧 그의 내면 깊숙이 감춰온 진실 어머니가 고통 없이 떠나길 바랐던 자기혐오와 슬픔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때 괴물의 눈빛은 처음보다 한층 더 묵직하다. 그는 말없이 코너를 바라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눈빛은 판단하지 않으며, 무언의 수용을 상징한다. 이 연출을 통해 관객은 괴물이 단순히 동화적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괴물의 눈빛이 강렬한 이유는 바로 코너의 감정과 완전히 연동된 방식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괴물을 외부 존재가 아닌 코너의 내면 투영물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괴물의 눈빛도 더욱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수준이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눈빛은 생각하고, 감정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감정 덩어리가 된다. 이는 시각적 상징이 감정 서사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다. 기술적으로도 괴물의 눈은 영화의 주요 VFX 중 하나다.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감정의 온도, 밝기, 습도까지 표현하는 정교함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눈에 습기가 차는 듯한 연출은 코너가 슬픔의 절정을 맞는 순간 괴물의 눈에서도 동일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CG와 감정 연기의 결합을 통해 괴물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호흡하며, 감정을 ‘말이 아닌 눈빛’으로 전달한다. 이는 인간 배우의 연기보다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연출은 관객과의 관계 형성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괴물은 말로는 무섭고 위협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상반된 메시지를 보낸다. 그는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는 괜찮다, 너의 감정은 틀리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이는 관객이 괴물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이유이며, 아이든 어른이든 이 영화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치이기도 하다.

<몬스터 콜>의 괴물은 말보다 눈빛으로 감정을 말하는 존재다.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방시키는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괴물의 눈을 통해 시각적으로 완성된다. 단순히 판타지적 캐릭터가 아니라, 감정의 거울로서 기능하는 괴물의 눈빛은 <몬스터 콜>을 단순한 성장 드라마를 넘어선 감정 예술 영화로 만든다. 그 눈빛 하나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치유의 언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