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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안해요, 리키> 근로와 노동, 프리랜서 노동, 평점 시스템

by borybory-click 2025. 10. 26.

영화 &lt;미안해요, 리키&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9. 12. 19.
  • 장르: 드라마
  • 평점: 9.19
  •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1분
  • 감독: 켄 로치
  • 주연: 크리스 히친, 데비 허니우드

 

1. <미안해요, 리키> 속 근로와 노동의 차이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단순한 한 가정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현대 사회가 ‘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현실이 담겨 있다. 켄 로치 감독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상품화되고, 어떻게 소외당하며, 결국 존엄까지 훼손되는지를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냈다. 주인공 리키는 프랜차이즈 택배회사에 ‘자영업자’로 계약을 맺고, 매일 정해진 시간 안에 수십 건의 택배를 배달한다. 공식적으로는 ‘자유로운 계약자’이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위험과 책임을 모두 떠안는 구조 안에 놓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리키가 수행하는 일이 전통적인 의미의 ‘근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리키의 일상을 통해, 우리가 흔히 섞어 쓰는 두 단어, ‘근로’와 ‘노동’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바꾸는지, 나아가 어떤 사회적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짚어본다. 근로라는 말은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정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즉 고용된 상태에서의 노동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적 용어로도 ‘근로자’는 고용관계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며, 이는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법적 주체를 의미한다.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보다 넓은 개념이다. 자율적이든 비자율적이든, 생계를 위한 일이든, 창작이나 돌봄과 같은 무임금의 활동이든, 인간이 에너지를 들여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리키는 표면적으로는 자율적 노동자다. 그는 직장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사업자’로서 계약했고, 자신의 차량을 사용하며, 시간 배분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일상은 전형적인 ‘근로자’보다 훨씬 더 강한 통제 안에 있다. 회사가 제공하는 스캐너는 그의 위치를 추적하고, 배달 지연이나 고객 컴플레인 하나로 수입이 줄어든다. 그는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계획표에서 빠져 있다. 이처럼 리키의 노동은 ‘근로’보다도 더 열악한 조건을 안고 있다. 하지만 법적 의미에서는 그는 근로자가 아니다. 보호받지 못하고, 계약이 끊기면 바로 해고되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은 단지 리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특히 플랫폼 경제 속에서는 이처럼 ‘근로’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 급증하고 있다. 배달 기사, 택배 기사, 대리운전기사, 플랫폼 콘텐츠 제작자 등은 법적으로는 독립 계약자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다. 회사는 이들에게 명령하지 않지만, 알고리즘과 평점,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실질적으로 이들의 삶을 통제한다. 자유로운 자영업자라는 명칭은 실제로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기 위한 구조적 장치일 뿐이다. 리키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그가 버는 돈은 생활비를 겨우 충당할 정도다. 보험료, 차량 수리비, 기름값, 시간 초과 비용 등은 모두 그가 떠안아야 한다. 만약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는 명목상 자유롭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근로와 노동의 개념 차이가 단지 단어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권리의 유무, 책임의 구조, 인간으로서 존엄이 보장되는지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기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리키는 근로자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니다. 그는 제도 밖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이며, 누구보다 고된 일을 하지만,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이다. 그가 행하는 노동은 생산적인 활동이지만,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한다. 영화 속 리키는 책임감 있고 성실한 아버지이지만, 결국 일에 쫓겨 가족과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진다. 그의 노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위한 것이 되었고, 그것은 곧 인간성을 빼앗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리키가 겪는 고통은 단지 육체적인 피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존엄을 잃어가고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택배를 배달하지 못하면 수입이 줄어들고, 고객에게 불친절하다는 평가라도 받으면 페널티가 부과된다. 회사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모든 결과를 리키 개인의 능력과 태도로 돌린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자율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철저하게 기계처럼 대하는 시스템. 근로계약이 아닌 노동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는 없고 책임만 있는 구조는 인간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영화는 말한다. 일은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만, 지금은 삶이 일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리키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하루 종일 집에 없다. 아내도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감정노동에 시달린다. 두 사람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사춘기 아들은 학교를 그만두려 한다. 가족은 함께 있지만, 서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성의 소외이고, 노동의 목적이 삶이 아닌 생존이 될 때 벌어지는 현실이다. 우리는 리키의 이야기를 통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이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왜 사람을 망가뜨리는 구조로 변질되었는가. ‘노동’이 ‘근로’라는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법과 제도는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독립 계약자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여전히 미흡하다. 그들은 일하지만,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계약하지만, 협상력이 없다. 현대 사회는 노동의 다양화를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 맞는 제도적 보완에는 실패했다. 결국, 근로와 노동의 차이는 단지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질과 인간의 존엄을 가르는 기준이다. 보호받는 노동, 협상 가능한 계약, 예측 가능한 수입, 그리고 인간다운 휴식이 보장되는 조건. 그것이 바로 ‘근로’가 갖는 최소한의 장점이다. 반면 리키가 보여주는 노동은 이 모든 것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고된 생존 활동이다. 그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일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시스템이 인간을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리키의 하루를 조용히 따라가게 한다. 그의 고된 숨소리, 꾹 눌러 삼킨 화, 아이를 바라보는 미안한 눈빛,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택배를 내려놓는 손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 영화는 거창한 담론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리키의 세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는 조금 더 보호받고, 누군가는 더 고립되어 있을 뿐이다.

이제는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모든 사람이 보호받는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이 함께 진화해야 한다. 리키가 겪은 고통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근로’라는 말속에 숨어 있는 권리의 구조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영화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도록, 일하는 모든 사람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일은 삶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미안해요, 리키>에서 보여주는 프리랜서 노동의 함정

현대 사회에서 ‘자율’은 가장 매력적인 단어 중 하나로 여겨진다. 고정된 출근 시간도 없고, 상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일할 장소와 시간까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특히 프리랜서, 1인 기업가, 독립 계약자, 플랫폼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자율성은 선택의 자유, 삶의 균형,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할 수 있는 근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책임의 전가, 불안정한 수입 구조,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등은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일상의 문제다. ‘자율성’은 때로는 실질적 자율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요된 고립과 위험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이런 문제를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리키는 택배 프랜차이즈에 ‘자영업자’ 형태로 고용되어 일한다. 표면적으로 그는 프리랜서다. 자신이 일할 시간과 구역을 선택하고, 수입도 자신의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통제당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물류센터에 도착해야 하고, 늦으면 벌금이 부과된다. GPS가 장착된 스캐너는 그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배달 지연 시 자동으로 경고가 전송된다. 식사 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들를 시간도 없다. 고객 평가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고, 실수 한 번이면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 이처럼 ‘자율’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스로 책임지는 구조’만이 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놓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도구, 차량, 장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며, 보험도 자비로 해결해야 한다. 아프면 무급이고, 실수는 손해로 이어진다. 고용주는 책임지지 않는다. 회사는 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의무도 없다. 계약서에는 ‘자유계약’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실제 노동 형태는 정규직보다 더 강도 높은 구속을 포함한다. 이는 프리랜서 노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적인 구조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의 성장과 함께 프리랜서 노동은 더욱 정교하게 감시되고, 분절되고, 평가받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라이더, 드라이버, 배달 기사, 온라인 콘텐츠 제작자, 원격 프리랜서 디자이너, 에디터, 마케터 등은 점점 더 정량적인 수치로 평가받는다. 몇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작업을 완료했는지, 고객 평점은 몇 점인지, 응답 시간은 얼마나 빠른지 등 다양한 요소가 이들의 생계와 직결된다. 그런데 이 모든 기준은 플랫폼이 정한다. 노동자는 선택할 수 없다. 일종의 ‘유사 고용’ 상태인 셈이다. 하지만 정작 법적으로는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은 이 구조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가?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존의 고용 구조가 주지 못한 유연함과 독립성을 프리랜서 노동이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유연함은 고정 수입의 부재로 이어지고, 독립성은 외로움과 책임의 과잉으로 바뀐다. 주말도 없고, 휴가도 없으며, 출산휴가나 병가 같은 개념조차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은퇴 후를 위한 준비는커녕, 다음 달 고정비 지출도 예측하기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간다.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놓치면 곧바로 수입이 줄기 때문에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 속 리키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며,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포기한 채 일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노동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며, 노동자 개인은 점점 존재감 없는 부속품이 되어간다. 자율이라는 환상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프리랜서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사회적 인식은, 이들의 고통과 불안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프리랜서 된 거 아니야?”라는 말은 이들이 마주하는 구조적 문제를 가리는 가장 전형적인 언어다. 자율성을 택했으니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는 인식은, 시스템이 가진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제도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고용보험, 건강보험, 산재보험 등 모든 복지 시스템은 ‘근로자’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는 그 안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프리랜서 혹은 비정형 노동 형태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시장의 변화와 기업의 책임 회피 전략, 플랫폼 중심의 노동 구조 확산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자율’이라는 말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율은 책임과 권리가 동시에 보장되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충분한 안전망이 존재할 때 자율은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의 프리랜서 노동은 자율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스템이 만든 환상이고, 불안정한 구조 안에서 굴러가는 착취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위한 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플랫폼 기업이 이들의 법적 지위를 외면할 수 없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보험 체계를 확대하며, 계약 시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강제력이 필요하다. 또한 프리랜서 개인에게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노무 지식과 협상력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일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과 안전을 희생시키면서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미안해요, 리키>는 이를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리키는 ‘자영업자’로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노동자였다. 그는 계약서에서 자유를 찾았지만, 일상에서는 그 어떤 시간도 자유롭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가장으로서의 삶은, 개인의 무능함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만든 결과이며,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이다. 오늘도 수많은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일하고 있다. 이름은 ‘자율’이지만, 그 하루는 감시와 경쟁, 불안과 고립으로 채워져 있다. 더 이상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구조가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질문해야 할 때가 아니라, 행동해야 할 시간이다. 자율은 권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며, 노동은 인간의 삶을 지켜주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율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비롯된다.

 

3. 플랫폼 시대의 평점 시스템

디지털 플랫폼의 시대, 우리는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손에 쥐었다. 음식 배달부터 택시, 가사 서비스, 온라인 상담, 콘텐츠 소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언제든지 ‘별점’을 줄 수 있고, ‘좋아요’를 누를 수 있다. 처음에는 이 평가 시스템이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서비스의 질을 향상하고, 비윤리적이거나 불성실한 서비스 제공자를 걸러내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시스템은 점차 다른 목적을 띠게 되었다. 플랫폼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노동자들을 감시하며,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소진하게 만드는 도구로 바뀌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리키는 택배회사와의 ‘자율 계약’ 아래, 매일 수십 개의 물건을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한다. 그는 회사의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실질적인 고용주가 부과하는 모든 규칙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리키는 항상 시간에 쫓기며, 고객의 불만 한 마디가 그의 하루 수입을 좌우한다. 그리고 그 모든 통제와 감시는, 바로 ‘평점’이라는 무형의 숫자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다. 오늘날 대부분의 플랫폼 노동자는 고객의 평가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거나, 페널티를 받는다. 택배 기사나 배달 기사, 차량 공유 서비스 드라이버, 심지어 프리랜서 번역가나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별점 5점 만점 중 4.7점 아래로 떨어지면 경고를 받고, 지속적으로 낮은 평점을 받으면 계약이 해지되거나 계정이 정지된다. 이 평점은 객관적인 기준이 아닌 소비자의 ‘기분’이나 ‘기대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노동자에게 책임이 없는 외부 상황에도 평가 점수가 깎인다. 예를 들어, 폭우로 인해 배달이 늦었음에도 고객이 별점 1점을 주면, 그 책임은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애초에 플랫폼은 소비자와 공급자 사이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그 ‘중립성’은 사실상 무책임을 뜻한다. 플랫폼은 별점을 통해 모든 통제권을 소비자에게 넘기고, 자신은 평가 시스템을 운영한다는 명분 아래 책임을 회피한다. 결국 별점은 노동자를 통제하는 가장 저렴하고 효과적인 감시 장치가 된 셈이다. ‘좋아요’와 ‘별점’이 무서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평가라는 행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노동자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습관적인 손가락 클릭일 뿐인 ‘별 3개’가, 누군가에게는 월세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플랫폼은 이 수치를 정량화해 경쟁을 유도하고, 높은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더 빠르게, 더 친절하게, 더 저렴하게 일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더 많은 노동을, 더 낮은 단가에 수행하면서도 정서적 감정 노동까지 함께 감내하게 된다.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은 서비스 업종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지만, 플랫폼 시대 이후 그 강도는 훨씬 높아졌다. 얼굴도 모르는 고객에게 언제나 웃어야 하고, 잘못이 없어도 사과해야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넘겨야 한다. 왜냐하면 고객의 기분이 평점으로 전환되고, 그 평점이 곧 수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런 정서적 압박을 시스템적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자신이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는 현실 속에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감정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러한 구조는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모델이다. 책임은 노동자가 지고, 서비스 품질은 고객의 평가로 스스로 관리되고, 불만이 있으면 플랫폼은 “고객님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간다. 이처럼 ‘좋아요’와 ‘별점’은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전가하고, 회사는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도 이익만 챙긴다. 소비자는 편리함을 얻지만, 그 이면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소비자도 때로는 억울할 수 있다. 불친절하거나 불성실한 서비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단순한 ‘불만 접수’가 아니라, 곧바로 노동자의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플랫폼은 중재자가 아니라 자동화된 처벌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은 수치화된 평가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일정 점수 아래로 떨어지면 계정 자체가 삭제되고, 그동안 쌓은 경력이나 평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불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생존 기반 자체를 빼앗기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나 특정 직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프리랜서 콘텐츠 제작자, 온라인 강사, 리뷰어, 심지어는 병원, 미용실, 카페와 같은 소규모 자영업자들까지도 ‘별점’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평점은 광고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부당한 리뷰 하나로 매출이 급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좋아요’와 ‘별점’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며, 그 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가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플랫폼은 단지 점수만 수집할 것이 아니라, 평가의 맥락을 함께 살펴야 하며, 노동자의 목소리도 반영되어야 한다. 단순한 별점 수치가 아니라,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모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중재 시스템이 요구된다. 또한 노동자에게도 평가 항목에 대한 이의 제기권, 정정 요청권, 보호 장치가 주어져야 한다. 소비자 역시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익명성 뒤에 숨어 있는 평가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다. 나의 한 줄 평이나 별점이 누군가의 수입을 줄이고,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피드백을 남길 수 있다. 책임 있는 소비란 단지 가격을 지불하는 행위가 아니라, 평가에도 윤리를 담는 행동이다. 결국 별점은 평가가 아니라,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점점 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키는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그의 노고는 점수로 환산되고, 그 점수는 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한다. 고객은 그를 모르고, 회사는 그를 보호하지 않으며, 남는 건 단 한 번의 ‘별 하나’가 불러온 불이익뿐이다.

우리는 편리함 속에서 누군가의 존엄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시스템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좋아요’와 ‘별점’이 진짜 피드백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지 감정의 발산이 아닌,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 표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플랫폼 기업은 수익이 아닌, 지속 가능한 노동 생태계를 위한 책임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