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 2015. 03. 12.
- 장르: 스릴러, 드라마
- 평점: 7.79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2분
- 감독: 홍석재
- 주연: 변요한, 이주승, 류준열, 하윤경, 유대형, 박근록, 오희준, 임지호, 김용준, 정재우
1. 현실보다 더 잔혹한 익명성
영화 《소셜포비아》는 한 편의 젊은 청춘 스릴러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차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귀신도, 살인자도 아닌 우리 안에 숨은 '익명성'에서 비롯된다. 현실보다 더 공격적이고, 더 무감한 모습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SNS 속 익명 군중들. 그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자리에서 무차별적인 판단과 폭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가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너무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소셜포비아》를 통해 드러난 SNS 군중심리와 디지털 가해 구조를 깊이 들여다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정의로운 마음으로 한 사람을 향한 진실을 추적하려 한다. 처음에는 그저 인터넷에서 논란이 된 여성의 말 한마디였다. 그 말이 불편하게 들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작은 불편함은 곧 거대한 증오로 확산된다. ‘이런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해?’라는 판단은 곧 ‘이 사람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SNS에서 정의감은 사적 감정에서 출발하고, 그 정당성은 ‘공유 수’와 ‘댓글’이라는 수치로 인증된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위해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정의란 결국 다수의 분노와 감정적 불쾌함이 쌓여 만들어낸 정서일 뿐, 냉정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이 바로 SNS의 군중심리를 가장 잔인하게 만든다. 개인의 생각이 여론이 되고, 여론이 집단의 ‘판결’이 되는 과정은 마치 공개 재판을 연상시킨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재판에는 법도 없고 절차도 없다. 오직 ‘다수의 공감’만이 유일한 심판 도구다. 현실에서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쉽게 폭언을 할 수 없다. 감정이 고조되어도 상대의 반응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온라인, 특히 익명 커뮤니티나 댓글 공간에서는 이러한 제어장치가 사라진다. 얼굴 없는 군중 속에서 감정은 마취되고, 책임감은 증발한다. 댓글 한 줄, 공유 한 번이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은 인식하지 못한다. 《소셜포비아》는 이 ‘익명성의 폭력성’을 극단적인 결과로 풀어낸다. 누군가가 실제로 죽음을 선택한 순간에도, 온라인상에서는 “그래도 걔가 잘못한 거지”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이는 현실에서 결코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만큼 SNS는 인간의 감정을 둔감하게 만들고, 남의 고통에 대해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감정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는 SNS 속의 ‘가해자’뿐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다수의 '관객'도 주목한다. 그 관객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지만, 가장 많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가장 많은 정보를 소비하고, 가장 많은 감정을 전이받고, 가장 많은 판단을 내리지만, 막상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로 선을 그어버린다. 이는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마주하는 장면이다. 비극이 발생하고, 뉴스에 오르고, 사건의 전말이 밝혀져도, 그 과정에서 손가락을 움직인 수많은 이들은 잠잠해진다. 관객은 책임을 지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SNS에 글을 올릴 때, 그것이 얼마나 퍼질 수 있을지, 얼마나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객이 많아질수록 행동은 과격해지고, 콘텐츠는 자극적이 되어간다. 이 구조 속에서 결국 가장 약한 사람부터 희생된다. 《소셜포비아》의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극 중 인물들은 한 사람을 향해 혐오와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폭력’을 자각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정의의 대변자’라고 믿는 이들조차, 실제로는 남의 고통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처럼 가해자는 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돼 있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그 가해자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지 않았다고 해서, 직접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책임도 없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방관자였고, 때때로 방조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직접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SNS는 감정의 증폭기다. 좋든 나쁘든, 감정이 빠르게 번진다. 한 사람의 분노는 금세 수천 명의 감정으로 확대된다. 이 감정은 논리보다 빠르며, 사실보다 강하다. 온라인상에서 ‘분노’는 유통되기 가장 좋은 콘텐츠다. 그렇기에 플랫폼은 자극적인 콘텐츠를 더 많이 보여주고, 사용자들은 그것에 더 많이 반응한다. 그 안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극’이고, ‘참여’이며, ‘공감’이라는 이름의 감정 공유다. 이 구조 속에서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분노에 반응하는 시간이 더 짧다. 그래서 가짜 뉴스, 왜곡된 정보, 조작된 이미지가 쉽게 퍼지고, 그것에 반응하는 이들은 자신이 가해자라는 자각 없이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한다. 《소셜포비아》는 그 구조를 하나하나 분해해 보여준다.
영화는 선악을 단정 짓지 않는다. 누구 하나가 명확한 악인도 아니고, 명백한 피해자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구조에서 정말 자유로운가?” 이 질문은 단순히 영화적 메시지를 넘어서, 현실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익명성은 때로는 고백의 도구이기도 하고,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면죄부로 쓰이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익명성은 흉기가 된다. 그리고 그 흉기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손에 쥐어진다.
2. <소셜포비아> 속 해시태그 정의
SNS가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정보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여론 형성의 장이 된 지는 오래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해시태그’다. 해시태그는 특정한 문장을 #기호와 함께 짧은 문장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검색과 연결, 확산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류 기능이었던 해시태그가, 이제는 ‘정의’나 ‘윤리’ 혹은 ‘분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각보다 위험한 이면이 존재한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그 이면을 날카롭게 들춰낸다.
영화 속에서는 단순한 의견 표현이 폭력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사소한 댓글이었고, 반박이었지만,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의 해시태그로 엮이며 군중 심리로 번지고, 결국 신상 털기와 사적 제재로 이어진다. ‘#여혐_아웃’, ‘#정의구현’, ‘#사이다’ 같은 해시태그는 일종의 신호탄처럼 기능한다. 이 해시태그들이 달린 글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더 빠르게 공유되며, 더 넓은 범위로 퍼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태그 자체의 검색력과 가시성이다. 이쯤에서 ‘해시태그 정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과거의 정의감이 행동이나 판단을 통해 드러났다면, SNS에서는 해시태그를 붙이는 것이 곧 정의 실현의 방식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정의의 내용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느냐, 얼마나 많은 동의를 얻느냐가 중심이 되는 구조로 변질됐다. 문제는 이 정의가 본질보다 ‘조회수’와 ‘반응성’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해시태그는 정의를 상징하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검색 최적화를 위한 기능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더 강한 키워드와 더 짧은 감정의 언어가 사용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진실을 파헤치기보다는 “이 사람 문제 있어요”라는 해시태그로 사람을 몰아가는 장면은,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반복된다. 잘못의 증명보다는, 의심 하나로 태그를 걸어두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사람은 낙인찍히고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특히 SNS에서는 감정적으로 몰입된 해시태그가 진실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퍼진다. 감정이 담긴 키워드는 더 많은 공감을 일으키고, 공감은 공유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는다. 해시태그로 분노에 동참하고, 정의로운 태도를 표출하며, 자기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뒤따라 생각하지 않는다.《소셜포비아》는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조명한다. 청년들이 누군가의 잘못을 폭로하려고 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정의보다는 해시태그에 가깝다. 즉, 그들의 목적은 진실의 확인이나 피해자의 회복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가까워진다. 이 과정은 해시태그가 지닌 시각성, 검색성, 연결성을 이용한 일종의 SNS 퍼포먼스다. 문제는 이 퍼포먼스가 진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영화 속에서 희생당한 인물은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공격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결국, 누구도 그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해시태그는 손가락을 튕기듯 가볍게 붙여졌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제 SNS에서 해시태그는 일종의 ‘편 가르기’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같은 사안에 대해 #OO무죄, #OO유죄 같은 양극단의 태그가 등장하며,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에 따라 소속감을 가진다. 이때 정의는 논의의 결과가 아니라, 소속의 신호다. 해시태그는 윤리적 판단보다 감정적 동조를 부추기며, 개인의 판단 능력을 점점 마비시킨다. 더 큰 문제는, 해시태그로 정의를 실현했다는 착각이 만들어지는 구조다. ‘#이건_아니지’, ‘#불매’, ‘#나도_당했다’ 같은 태그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참여와 연대를 의미하는 시대가 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 확인이나 법적 절차는 뒷전이 된다. 이는 진짜 정의와는 거리가 멀고, 검색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감정 소모의 흐름일 뿐이다. 결국 영화 《소셜포비아》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SNS에서 정의롭다고 믿었던 태도들이, 정말 정의를 구현했는가. 아니면 단지 검색에 잘 걸리고, 공감 수를 올리는 키워드를 소비했을 뿐인가. 해시태그는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 자극적이고 단순하게 보여주기 위한 포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해시태그로 누군가를 응원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매장할 수도 있다. 해시태그 정의가 ‘말하기’가 아닌 ‘광고’처럼 사용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SNS 안에서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에 더 익숙해졌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결국 “#난_이런_사람입니다”라는 선언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이제는 다시 돌아봐야 한다. 내가 붙이고 있는 해시태그는 진심의 표현인가, 아니면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한 전략인가. 정의는 태그로 완성되지 않는다. 《소셜포비아》는 해시태그로 만들어진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면서, 우리가 손쉽게 선택한 ‘보여주기 정의’의 이면을 철저히 비판한다.
3. 과잉정보 사회 속 망각의 기술
영화 《소셜포비아》는 일상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우리 모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이 영화는 ‘기억’과 ‘기록’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왜곡되고 폭력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은 일견 특정한 인물의 잘못과 그로 인한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SNS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 기억되고 축적되는 이미지, 그리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잔재가 있다. 결국 이 영화는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불필요한 정보를 지우는 ‘망각의 기술’이라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과잉정보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천 개의 뉴스가 올라오고, 실시간 검색어가 바뀌며, SNS에서는 끝도 없이 콘텐츠가 쏟아진다. 뉴스 앱을 켜면 1시간 전에 터진 사고도 벌써 ‘어제 일’처럼 취급된다. 사용자는 방대한 양의 정보에 노출되면서도 제대로 된 맥락이나 진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바로 이 점이 영화 《소셜포비아》의 핵심 배경이다. 한 여성의 과격한 발언, 그에 대한 반박, 이어지는 집단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낳은 결과. 모든 것은 '기억되고 기록된' 정보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정보가 끝없이 덧씌워지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진실보다 이미지가 앞선다는 것이다. 기억은 선택의 산물이다. 누군가는 잊고, 누군가는 각인하며, 누군가는 왜곡한다. 문제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기억의 자율성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관련 콘텐츠를 노출하고, SNS는 멈추지 않고 과거의 글을 끌어올린다. 댓글 하나, 영상 하나, 한때 유행했던 해시태그조차도 다시 회전문처럼 등장한다. 그 정보가 사실인지, 여전히 유효한지,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단지 ‘클릭’이고 ‘조회수’ 일뿐이다. 《소셜포비아》는 바로 이 비틀린 디지털 기억을 통해 고통이 어떻게 반복되고 확대되는지를 보여준다. 극 중 인물들은 이미 정리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과거의 감정과 기록에 얽매인다. 누군가는 그때의 댓글을 다시 보고 상처를 되새기고, 누군가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 사건 자체를 단지 '인터넷에 있었던 일' 정도로 소비하며 넘어간다. 여기서 문제는 명확해진다. 망각이 없다면 용서도, 회복도, 성찰도 없다. 정보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기억은 때때로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을 반복해 보게 되는 이 상황은 인간의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누군가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 흔적은 온라인 어딘가에 남고, 검색 한 번으로 다시 튀어나온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과거를 '닫을 수 있는 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삭제되지 않는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더 피곤해지고, 더 날카로워지고, 더 자극적인 정보에 반응하게 된다. 과거에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줬다. 시간이 흐르면 사건은 잊히고, 감정은 희미해지고, 기억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흘러도 정보는 살아남는다. 심지어 더 생생하게 리마스터되고 편집되어 유포된다. 이것이 바로 망각이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잊는다는 건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덮고, 정리하고, 다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권리를 점점 박탈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개념이 바로 ‘잊힐 권리’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 개념은 이미 법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실제로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생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논의가 미비하다. 영화 《소셜포비아》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드러난다. 누군가의 일상이 특정 사건으로 기록되고, 그것이 온라인상에 박제된 이후에는 사실상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단정되어버린다. 여기에는 어떤 반성도, 해명도,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망각의 기술은 단순히 정보를 지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적 기억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고통을 다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그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시작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잘못한 이들을 평생 ‘그 일’로만 기억하고, 당했던 이들을 끝없이 고통의 이미지로만 소비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는 동안, 새로운 상처와 고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록이 아니라, 기록을 분별하고,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보 소비의 시작이고, 인간적인 회복의 출발점이다. 《소셜포비아》는 그 회복을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겁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과잉정보의 시대에서 우리는 정보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어떤 정보를 ‘놓아줄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정보보다 앞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