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어느 가족> 소매치기 장면, 유리와 관객이 바라보는 세상, 쇼타와 유리가 가족을 대하는 방식

by borybory-click 2025. 3. 4.

영화 &lt;어느 가족&gt; 관련 사진

 

영화 <어느 가족>에는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서 생활하며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족이 있다. 우연히 길 위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살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가족이 흩어지게 되고 각자 품고 있던 비밀과 간절한 바람이 드러나게 된다. 본 글에서는 영화 속 소매치기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펴보고 유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관객이 바라보는 세상을 비교해 본다. 그리고 쇼타와 유리가 가족을 대하는 방식을 탐구해 본다.

1. 영화 속 소매치기 장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2018)은 법적, 혈연적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통적인 가족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매치기 장면이 단순한 범죄 행위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 속에서 도둑질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어느 가족에서는 이 행위가 ‘생존을 위한 선택’이자, 심지어 가족 간의 유대를 형성하는 따뜻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소매치기 장면이 왜 부정적인 범죄가 아닌 ‘가족적 유대’와 연결되는지, 그리고 이 연출이 관객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분석해 보겠다. 영화의 초반, 쇼타(죠 카이리)와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함께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장면이 마치 일상적인 교육 과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도둑질을 단순한 생존 기술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 간의 비밀스러운 놀이처럼 가르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훔치면 안 돼. 하지만 팔려 있는 건 괜찮아."라는 대사는 범죄의 도덕성을 흐리게 만들면서, 쇼타가 새로운 사회적 규칙을 배우는 과정처럼 표현했다.

이 장면에서 소매치기 행위 자체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두 사람이 협력하는 방식이다. 쇼타는 오사무의 지시에 따라 과자를 슬쩍 가져가고, 오사무는 자연스럽게 뒷정리를 한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팀워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가족들이 함께 식사 준비를 하거나 집안일을 나누는 모습과 닮아 있다. 이처럼 영화는 소매치기를 범죄로 강조하는 대신, 협력과 관계 형성의 순간으로 연출함으로써 관객이 단순히 "나쁜 짓"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쇼타는 처음에는 오사무가 시키는 대로 소매치기를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행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리가 가족에 합류한 이후 쇼타는 그녀에게도 소매치기를 가르치려 한다. 이 장면에서 쇼타는 과거 오사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유리에게도 "이건 괜찮아"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도둑질을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쇼타는 점차 ‘소매치기’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깊이 연관된 행위임을 깨닫게 된다. 단순히 오사무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인이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쇼타는 후반부에서 일부러 소매치기를 하다가 잡히게 된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그동안 소매치기를 하며 가족과 유대감을 느꼈지만, 이제 그는 이 방식이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한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 범죄 장면은 빠른 편집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으로 관객에게 불안함을 유발한다. 하지만 어느 가족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방식을 사용한다. 영화는 소매치기 장면을 긴 롱테이크로 촬영하여, 쇼타와 오사무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따라간다. 이는 마치 범죄 행위를 몰래 엿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소매치기 장면에서는 긴박한 배경음악 대신, 오직 거리의 소음과 캐릭터들의 대화만이 들린다. 이로 인해 장면이 자연스럽게 흐르며, 관객은 ‘위험한 순간’이라기보다 ‘하루의 일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어두운 골목이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 내리쬐는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영화는 관객이 ‘범죄 행위’보다는 ‘함께하는 순간’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 모든 연출 기법은 소매치기가 단순한 생존 방식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어느 가족에서 소매치기는 단순한 범죄 행위가 아니다. 이는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 즉 그들만의 규칙과 윤리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이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법과 윤리는 이 가족을 보호했을까, 아니면 그들을 더욱 소외시켰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영화는 단순히 소매치기를 범죄로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와 생존 방식에 대한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도둑질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대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기준과 가치관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든다. 결국, 어느 가족의 소매치기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2. 유리와 관객이 바라보는 세상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2018)은 다양한 인물의 시선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을 탐구한다. 그중에서도 영화 초반부에 새롭게 가족에 합류하는 유리(미유 사사키)의 시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리는 본래 자신을 학대하던 친부모와 살다가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에 의해 ‘구출’되듯 이 가족에 합류한다. 이후 그녀는 이 새로운 환경을 낯설어하면서도 점점 적응해 나가는데, 흥미로운 점은 유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객이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유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관객이 바라보는 세상이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며, 이를 통해 고레에다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영화 초반, 유리는 추운 겨울날 집 밖에서 홀로 방치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 듯 보이며, 오사무와 노부요는 그런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이 장면에서 유리는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가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의해 환경이 바뀐 존재다. 그러나 영화는 이 상황을 단순히 ‘구출’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오사무와 노부요가 유리를 집으로 데려오는 순간은 따뜻하게 연출되지만, 이는 법적으로는 명백한 ‘유괴’에 해당한다. 관객은 이들이 유리를 학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 같지만, 유리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세계에서 강제로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특히, 유리가 처음 이 가족과 함께할 때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그녀가 여전히 이전 환경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쉽게 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이는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 반영된 것으로, 새롭게 접한 가족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쉽게 경계를 허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아이의 시선에서는 '구출'과 '유괴'의 경계가 모호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에서 유리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고레에다는 관객이 가족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유리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영화 초반에는 오사무와 노부요가 유리를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들을 ‘선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유리는 점차 새로운 가족에게 마음을 열어 가고, 이 과정에서 영화는 그녀가 점점 더 행복해지는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경찰이介入(개입)하면서 유리가 다시 친부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드러나고, 관객은 ‘과연 어떤 선택이 옳았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즉, 고레에다는 관객이 처음에는 유리의 입장에서 가족을 바라보도록 만들지만, 점차 사회적 시각과 윤리적 딜레마를 함께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고레에다는 유리의 시선을 강조하기 위해 몇 가지 독특한 연출 기법을 사용한다. 유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종종 낮은 앵글에서 촬영된 화면이 등장한다. 이는 유리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가족 구성원들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쇼타(죠 카이리)와 함께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을 보면, 카메라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촬영되어 있다. 이는 관객이 아이들의 세계에 더 몰입하도록 만들고, 유리가 점점 새로운 가족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영화 초반, 유리는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물리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집 안에서도 구석진 곳에 앉아 있거나, 식사할 때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가족들과 가까이 앉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영화는 유리가 점차 새로운 가족에 정서적으로 동화되는 과정을 공간적인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유리는 영화 속에서 종종 거울이나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다. 이는 그녀가 여전히 ‘완전히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존재’ 임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예를 들어, 가족들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도 유리는 문 틈이나 창문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이질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유리는 다시 친부모에게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녀가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영화는 유리가 다시 학대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며, 그녀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리는 여전히 어리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어른들이 정한 규칙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쇼타가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던 방식(의도적으로 경찰에게 잡힘)과 대조적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유리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녀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영화는 유리가 가족과 함께했던 순간이 따뜻했다고 암시하지만, 그녀가 이별 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유리가 바라본 세상과 우리가 바라본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3. 쇼타와 유리가 가족을 대하는 방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2018)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혈연이 아닌 ‘함께하는 시간과 관계’로 정의한다. 특히, 영화 속에서 두 아이, 쇼타(죠 카이리)와 유리(미유 사사키)는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가족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쇼타는 태어날 때부터 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점차 가족을 형성해 나간다. 반면, 유리는 처음부터 원치 않은 환경에서 구출된 존재로, 이 가족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두 아이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어른들에게 보호받지만, 가족을 바라보는 시각과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쇼타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자신이 이 가족의 ‘진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혈연관계가 아닌 채로 가족이 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부모로부터 학습된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는 오사무를 따르면서도, 그를 완전히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오사무가 "아빠라고 불러도 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쇼타는 이를 거부한다. 이는 그가 가족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이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쇼타는 가족을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후반부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 잡힌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선택이었다. 쇼타의 행동은 "우리는 함께하지만, 진짜 가족일까?"라는 질문을 내포하며, 영화가 던지는 가족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을 제공한다. 반면, 유리는 쇼타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가족을 대한다. 그녀는 본래 친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학대를 받으며 방치되던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오사무와 노부요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가족의 따뜻함’을 경험하게 된다. 유리는 쇼타와 달리 이 가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보호받기를 원한다. 그녀는 가족의 애정 표현을 처음 경험하면서 점차 밝은 아이로 변해간다. 그녀가 처음 이 가족에게 왔을 때, 몸을 움츠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던 모습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쇼타와 함께 놀고, 노부요에게 안기며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유리가 처음으로 ‘가족’을 경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처음으로 경험하는 ‘소속감’과 ‘안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유리는 다시 친부모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이 떠나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유리가 처음으로 경험한 가족의 형태가 비록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녀에게는 더 큰 의미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쇼타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만, 유리는 가족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쇼타는 도둑질을 거부하고 점점 가족과의 거리를 두지만, 유리는 처음부터 가족에 동화되며 보호받고 싶어 한다. 쇼타는 경찰에 일부러 잡히면서 가족과의 단절을 선택하지만, 반대로 유리는 원하지 않게 가족을 떠나게 된다. 쇼타는 어른들의 보호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선택을 하려 하며, 유리는 처음으로 어른들에게 보호받으며 안정감을 느낀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영화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쇼타에게 가족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관계이지만, 유리에게 가족은 처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따뜻한 관계였다. 이 차이는 결국 어느 가족이 전통적인 혈연관계가 아닌 ‘함께하는 시간과 경험’을 통해 가족을 정의하려 한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결국, 가족은 법적인 관계나 혈연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선택이고, 누구에게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영화는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결론

영화 어느 가족에서 소매치기는 생존 수단을 넘어 유대감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쇼타와 오사무는 도둑질을 하며 협력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신뢰하는 방법을 배운다. 어느 가족에서 유리는 조연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녀의 시선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법보다 중요한가? 행복이란 누가 정의하는가? 이런 복합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객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유리가 바라본 세상과 우리가 바라본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쇼타와 유리는 같은 가족 내에서 자랐지만,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쇼타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결국 가족을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반면 유리는 가족이 필요했던 존재로 결국 원치 않는 방식으로 가족과 이별해야 했다. 이처럼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같은 환경에서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 가족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