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 2008. 10. 16.
- 장르: 드라마
- 평점: 8.12
- 등급: 전체 관람가
- 러닝타임: 103분
- 감독: 패트리시아 리건
- 주연: 아드리안 알론소, 케이트 델카스틸로
1. <언더 더 쎄임문>이 전하는 국경과 모성애
영화 《언더 더 쎄임 문(Under the Same Moon, 2007)》은 이민이라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모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국경을 중심으로 나뉜 두 인물, 멕시코에 남겨진 아들 ‘칼리토스’와 미국으로 일하러 간 엄마 ‘로사리오’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산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성이 어떻게 사회적 제도와 권력, 구조적 장벽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서는가에 대한 서사다.
로사리오는 멕시코에서 아들과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미국으로 건너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가사노동을 하며 돈을 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떠나야 했고, 이 결정은 수많은 ‘이민자 어머니’들이 겪는 고통과도 맞닿아 있다. 영화 속 로사리오의 고군분투는 단순히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이동한 노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는 여전히 가족의 중심이며 돌봄의 책임을 지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경제적 현실은 많은 여성을 가족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게 만든다. 영화에서 로사리오는 자신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야 했다. 국경이라는 장벽은 그녀에게 정서적 단절은 물론, ‘엄마로서의 권리’마저 흔들리는 상황을 만든다.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로사리오를 단순한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능동적인 주체다.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타국의 차가운 사회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언제나 아들의 생일엔 빠짐없이 전화를 걸며 애정을 전한다. 로사리오의 존재는 모성은 반드시 아이 곁에 있어야만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사랑은 국경을 넘어 전달된다. 그렇다면 국경은 단지 지리적인 선일까? 영화는 국경을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라, 감정과 권리, 정체성과 연대가 분절되는 공간으로 그려낸다. 국경은 로사리오를 ‘불법체류자’로 낙인찍으며 사회적 권리를 박탈하고, 그녀의 모성마저 가려버리는 기능을 한다.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고, 노동자 신분으로 착취당하며, 언제든 추방될 수 있는 불안 속에서도 로사리오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모성’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결단으로 이뤄진 실천적 사랑이다. 반면, 칼리토스는 나이에 비해 매우 성숙한 인물이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고통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머니를 돌보고, 돈을 모으고, 결국 혼자서 국경을 넘어 엄마를 찾아 나선다. 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며 관객은 끊임없이 감정의 파도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탁월한 이유는, 그런 감정을 ‘피해의 감성’으로만 그리지 않고, 서로를 향한 주체적인 감정과 실천으로 승화시킨다는 데 있다. 여성 서사는 오랜 시간 동안 ‘희생’과 ‘인내’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을 지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미지로 고정돼 왔다. 그러나 《언더 더 쎄임 문》 속 로사리오는 그런 전형을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고통받지만, 동시에 선택하고, 결단하고, 싸운다. 아이를 위해 세상의 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단순한 ‘모성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안에서 주체로서 행동하는 여성의 초상이다. 이 영화에서 국경은 단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 선이 아니라, 모성의 발현과 실현을 가로막는 제도적 벽이다. 그리고 그 벽을 넘기 위해 로사리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고통만이 아니다. 그녀는 ‘엄마이기 때문에’ 선택한 삶에서 ‘엄마가 아니게 되는’ 위기를 끊임없이 겪는다. 이때 영화는 ‘모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시대와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칼리토스가 로사리오를 찾아가는 장면을 통해, 이 분열된 감정의 구조를 하나로 꿰맨다. 눈물 없이 보기 어려운 이 재회는 단지 개인의 감정적 완성이 아니라, 국경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장벽을 감정의 힘으로 돌파한 장면이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모성은 결코 거리나 법, 신분 따위로 단절될 수 없으며, 여성은 언제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실현해 낸다는 것.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이민자 여성들이 로사리오처럼 ‘떠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쉽게 비난받거나,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언더 더 쎄임 문》은 말한다. 그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나서는 것이며, 그 속에는 가장 순수하고 강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로사리오의 모성은 사회가 정의하는 이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현실의 거칠고 냉정한 조건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형태로 발현된 사랑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민자’라는 단어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된다. 특히 여성 이민자, 어머니로서의 이민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삶과 사랑을 감당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국경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너머에서 모성은 꺾이지 않고 흐르고 있으며, 영화는 그 흐름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언더 더 쎄임 문》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제도와 현실의 벽을 넘어서, 인간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로사리오는, 말없이 묵묵하게 답한다. “나는 엄마다. 국경 너머에서도.”
2. <언더 더 쎄임문> 아이의 시점으로 본 미국 사회의 차가움
2007년작 영화 《언더 더 쎄임 문(Under the Same Moon)》은 이민자 문제, 가족 해체, 모성애, 사회적 냉대 등 여러 복합적인 주제를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하게 다가오는 건 ‘아이의 시선’이다. 영화는 어린 주인공 칼리토스(Carlitos)의 여정을 따라가며 미국 사회가 가진 이면, 특히 이민자에게 보여주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조명한다. 어른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풍경과 사건들이 아이의 눈을 통해 비로소 관객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미국은 오랫동안 '기회의 땅'으로 불려 왔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국경을 넘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로사리오 역시 그런 어머니 중 하나다. 그녀는 멕시코에 아들 칼리토스를 남겨둔 채, 로스앤젤레스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이민자 여성 로사리오의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아들 칼리토스의 시선을 통해 미국 사회를 바라보게 만든다. 아이의 시선은 어른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민감하다. 세상의 이면을 직접 설명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침묵과 표정,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의 무정함을 더 정확히 전달한다. 칼리토스는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엄마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국경을 넘는다. 겨우 아홉 살 남짓의 아이가 홀로 미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그의 여정은 미국 사회의 냉기와 마주하는 연속이다. 처음 칼리토스를 태운 청년들은 그를 데려다주겠다는 약속과 달리 그를 버리고 사라진다. 아이는 낯선 도시의 길 위에 홀로 남겨지고, 그곳에서 바라본 미국은 더 이상 꿈의 땅이 아니다. 도와줄 것 같았던 어른들은 대부분 무심하거나 거리를 둔다. 그의 존재를 위협으로 보거나, 문젯거리로 여긴다. 영화는 이처럼 미국 사회가 ‘불완전한 이방인’에게 얼마나 배타적이고 비정한지, 아이의 처지를 통해 묘사한다. 노동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리토스는 식당이나 가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아이라는 이유로 고용을 거부당하거나, 이민자라는 이유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의 보호자가 되어준 엔리케조차도 감정은 있지만, 시스템 바깥에 사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법과 시스템으로만 움직이고, 감정의 여지는 매우 좁다. 아이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는 법적으로 합법적인 존재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지고, 그 판단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쉽게 소외되고 잊힌다. 이 영화에서 가장 뼈아픈 순간 중 하나는, 칼리토스가 공중전화박스에서 엄마와의 정기 통화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그 좁고 낡은 공간에서 그는 하염없이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장면은 그저 가족 영화의 감정선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아이가 겨우 버티는 방식을 상징한다. 감정적 교류의 공간은 줄어들고, 아이는 시스템의 구멍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다. 그 기다림이 관객에게는 오히려 사회 구조의 차가움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만든다. 미국 사회의 ‘합리성’은 종종 ‘냉정함’으로 바뀌곤 한다. 이민자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위험 요소’로 분류된다. 복지 대상도, 교육 대상도 아닌, 관리해야 할 존재로 간주되는 이 현실은 칼리토스의 눈에 그대로 투영된다. 어른들은 말없이 지나치고, 행정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며, 아이의 감정과 상황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처럼 사회가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를 아이의 고독한 여정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칼리토스의 감정을 ‘극단적 고통’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돌파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이는 단지 한 아이의 용기 있는 성장 이야기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가진 폐쇄성에 대한 정면돌파이자 작지만 큰 저항이다. 아이가 국경을 넘어 걷는 장면, 일자리를 구하려 돌아다니는 장면, 엄마의 주소를 단서 삼아 시내를 헤매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시스템 바깥의 인간이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드라마다. 감정선의 클라이맥스는 마침내 칼리토스가 엄마를 다시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는 그 재회는 ‘차가운 미국’ 속에서 피어난 유일한 온기이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수다. 사랑은 국경을 넘고, 아이는 끝내 사람을 찾았다는 희망. 하지만 그 이전의 모든 과정은 명확하게 사회가 아이를 어떻게 외면하는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의 초상이다. 이처럼 《언더 더 쎄임 문》은 아이의 시선을 통해 사회를 직조해 낸다. 정치적 설명이나 복잡한 제도 분석 없이, 단지 ‘아이 하나의 감정’을 따라가며 시스템의 빈틈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의 누적이 관객에게 뼈아프게 와닿는다. 차가움은 온도나 표면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전하는 차가움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다.
《언더 더 쎄임 문》은 이민자 아동이 겪는 사회적 소외를 극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잔잔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더 깊은 공감과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라는 존재는 사회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은 정반대다. 보호는커녕, 시스템은 그들을 누락시키고 외면하며, 그 틈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적으로 아이의 몫이 된다.
미국 사회의 냉정함은 어떤 사건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문화적 거리이자, 제도적 배제이며, 사회적 무관심이 축적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눈동자, 망설임, 말 없는 울음, 손가락을 움켜쥔 작은 주먹 등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우리는 그 작은 몸짓에서 거대한 사회 구조를 본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런 진실을 아이의 시선이라는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언더 더 쎄임문> 영화 제목의 상징
2007년에 개봉한 영화 《언더 더 쎄임 문(Under the Same Moon)》은 멕시코와 미국이라는 공간적 거리를 배경으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헤어진 모자(母子)의 감정적 거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제목인 ‘Under the Same Moon’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문장이다. 단순히 시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정서와 삶의 조건, 그리고 관객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연결시키는 감정의 다리로 작용한다.
'같은 달 아래'라는 말은 표면적으로 보면 지리적으로 떨어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하늘, 같은 달을 보고 있다는 상상을 전제로 한다. 달은 매일 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이며, 그것은 인간에게 오래전부터 연결의 상징이 되어왔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달을 보며 마음을 전하고, 또 어떤 이는 지나간 가족을 떠올리며 밤하늘의 달을 응시한다. 이 영화에서 달은 바로 그런 감정의 매개체다. 헤어진 모자(母子)가 서로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은 달을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안을 얻는다. 로사리오와 칼리토스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살아간다. 로사리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며 아들을 부양하고, 칼리토스는 멕시코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들에게 ‘같은 달’은 유일한 연결 고리다. 영화 속에서 로사리오가 칼리토스에게 말하던 장면이 있다. “밤이 되면 하늘을 봐. 우리 둘 다 같은 달을 보고 있을 거야.”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약속이자, 정서적 동시성의 선언이다. 물리적 거리와 제도적 장벽이 그들의 재회를 막고 있지만, 감정만큼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영화가 전달하는 '같은 달 아래'라는 상징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보통 가족은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이 영화에서는 함께 있지 못해도 진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칼리토스는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어머니는 그 짧은 시간의 통화를 위해 온종일 긴장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둘의 감정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서로에게 닿는다. 이는 현대 사회가 겪는 여러 형태의 가족 분리에 대한 반응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공유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달이라는 존재는 상징적으로도 흥미롭다. 달은 늘 일정한 주기를 따라 떠오르고 사라지며, 그 변화 속에서 인간은 계절을 느끼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달은 불변하지 않지만, 규칙적이다. 그것은 늘 어디선가 떠 있고,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성질은 영화 속 캐릭터들의 상황과 닮아 있다. 로사리오의 삶은 고정돼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하며 불안정하지만, 그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규칙적이고 흔들림이 없다. 달은 바로 그 모성애의 상징처럼 기능하며, 감정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표현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같은 달 아래’라는 말은 감정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로사리오와 칼리토스의 상황은 특정한 국적과 신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 수많은 가족이, 여러 가지 이유로 떨어져 살아간다. 전쟁, 경제적 이유, 이혼, 해외 취업, 질병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감정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리움, 애틋함, 미안함, 기다림, 불안. 이 영화는 그 감정을 특정한 언어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달’이라는 보편적 상징을 통해, 감정의 언어를 전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게 한다. ‘Under the Same Moon’이라는 제목이 특별한 이유는, 이 작품이 다루는 사회적 이슈와 절묘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경제적 격차, 제도적 차별, 인종 문제, 불법 이주 등 복잡한 사회적 논쟁의 중심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거대한 문제를 정치적 언어가 아니라, 아이의 시선과 엄마의 마음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을 가장 잘 담아내는 말이 바로 ‘같은 달 아래’이다. 그 말은 경계 없는 감정의 공간, 인간 사이의 보편적인 연결,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감정이 단절된 시대에,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말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지 않아도 그 사람을 느낄 수 있다고. 제도나 거리, 신분이나 법적인 제약이 감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간결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중에서도 제목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가장 조용하고 강력한 언어’다. 마치 관객에게 속삭이듯, "우리는 모두 같은 달 아래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현대인의 삶은 점점 더 단절되고 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는 언제든 연결될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더욱 멀어지는 시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 영화는 한 편의 편지처럼 다가온다. 겉으로는 국경과 이민이라는 사회적 현실을 다루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도 개인적이고 친밀하다. 그것은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 ‘멀리 있어도 서로를 느끼는 마음’이다. 달이라는 존재는 이 모든 감정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멀리 떨어진 가족이 있다면, 오늘 밤 달을 한번 올려다보길 바란다. 그곳에서도, 다른 시간대에서도, 누군가는 똑같은 달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다. 거리가 있어도 마음은 닿을 수 있고, 사회가 나누어 놓은 선이 있어도 감정은 흐를 수 있다는 것. 《언더 더 쎄임 문》은 그래서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감정적 경험이자, 정서적 기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