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 개봉일: 2023. 03. 29.
- 장르: 코미디, 드라마
- 평점: 8.25
- 등급: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126분
- 감독: 마크 포스터
- 주연: 톰 행크스
1. 오토의 삶과 일상 노동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 2022)>는 겉으로는 ‘고독한 노인의 변화’라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따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극적인 사건보다 일상의 반복되는 행위인 노동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오토의 냉소적인 태도와 점진적인 감정 변화에 집중하지만, 정작 그의 감정을 지탱하고 변화로 이끄는 근간은 바로 손으로 행하는 실용적인 ‘일’들이다.
영화 속 오토는 퇴직한 철도 기술자이며, 삶의 유일한 중심이었던 아내 ‘소냐’를 잃은 뒤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여러 번 삶을 포기하려 시도하지만 매번 어떤 이유로든 방해받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미루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을 준비하면서조차 철저한 질서와 계획 속에서 삶을 정리한다는 점이다. 주변을 청소하고, 유서 대신 정리 리스트를 만들고, 심지어 쓰레기 분리 배출까지 끝마친다. 이 모든 행위는 죽음마저도 ‘삶의 연장’처럼 다루는 오토의 철학을 반영한다. 그에게 노동은 생존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다. 일상 속 모든 반복되는 ‘작은 일’들이야말로, 오토가 자신을 유지하고 세계와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주차라인을 지키고, 낯선 차량의 번호판을 기록하고, 마을의 재활용 규칙을 고집하는 행위는 단순한 강박이 아니다. 그것은 붕괴된 세계에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오토라는 남자>는 노동과 감정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감정이 형성되고, 치유가 이루어진다. 오토가 행하는 노동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죽음 이후의 일상을 ‘붙잡기 위한 행동’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애도 과정 중 ‘행동 중심의 대처 전략(Behavioral Coping)’과 유사하다. 차를 고치고, 고양이를 돌보고, 집을 정리하고, 이웃의 사다리를 수리하는 일련의 행동은 오토가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방법이다. 그는 타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제공함으로써 마음을 표현한다. 이처럼 실용성은 단순 기능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전환된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과 편의, 속도 중심의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반복적이고 단순한 일, 손으로 하는 노동, 체력과 경험이 필요한 작업들은 ‘비효율적’이고 ‘낡은 방식’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오토라는 남자>는 반문한다. “실용적인 인간은 정말로 쓸모없어진 존재인가?” 오토는 전통적인 노동자다. 그는 무언가를 손으로 만들고, 고치고, 정리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에는 ‘성과’나 ‘이윤’은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철저한 공공성과 책임감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솔 가족의 차량 문제가 생겼을 때 오토는 단 한 마디도 없이 엔진을 열고 고친다. 이는 과시가 아니라, 그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실제로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노동의 가치를 ‘관계적 노동(Relational Labor)’ 혹은 ‘케어 노동(Care Work)’으로 설명한다. 이 노동은 시장가치보다 사람 사이의 신뢰와 지속 가능성을 창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오토는 비록 고립된 인물이지만, 반복되는 ‘쓸모 있는 행동’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실용성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존재의 철학으로 확장된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디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오토라는 남자>는 그 해답을 ‘노동’에서 찾는다. 오토는 철도 기술자였고, 그의 삶은 규칙적이고 기술 중심이었다. 그러나 퇴직과 동시에 그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아내의 죽음은 그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런데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오토가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방식이 이웃을 돕는 실용적 행위라는 점이다. 그는 다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누군가는 그에게 아이 양육을 부탁하고, 누군가는 집 수리를 의지한다. 오토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에서 ‘행동으로 감정을 전하는 사람’으로 진화한다. 이는 감정 중심의 사회에서 ‘일 중심의 인간’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영화적 답변이 된다. 연출 면에서도 <오토라는 남자>는 노동을 드라마의 중심 요소로 배치한다.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오토의 ‘손’과 ‘행동’에 집중한다. 차에 손을 대는 장면, 공구를 정리하는 장면, 쓰레기를 분류하는 장면은 감정 없이 그려지지만, 그 안에는 극적인 긴장감이 흐른다. 이는 마치 노동이 감정의 대사 역할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오토의 노동은 점차 ‘자신을 위한 것’에서 ‘타인을 위한 것’으로 확장된다. 이는 감정의 외화, 혹은 관계 회복의 상징이다.
<오토라는 남자>는 단순한 휴먼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 나가는 ‘노동의 드라마’다. 말보다 행동으로, 감정보다 실용성으로, 고통보다 책임으로 삶을 이어가는 오토의 모습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행동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쓰레기를 분리하고, 낡은 도구를 정리하며, 꺼져가는 보일러를 다시 켜는 그 손길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한 작은 실용적 행동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2. 고령자들의 디지털 사회 충돌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는 표면적으로는 잃어버린 정을 되찾는 휴먼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사람 사이의 온기 회복’에 그치지 않는다. 오토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디지털 문명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감정적 거리를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이 영화는 노년기 인간이 디지털 세계와 충돌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오토의 분노, 고립, 그리고 천천히 이뤄지는 수용의 과정은 단지 한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테크놀로지 중심 사회에서 고령자들이 겪는 실질적 갈등과 심리적 이중성을 상징한다.
오토는 철도 기술자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고, 정비하며 세상과 소통해왔다. 그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모든 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믿을 수 있는 것’들로 구성돼 있다. 이런 아날로그적 세계에 익숙한 오토에게 디지털 기술 기반의 비대면 사회는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이다. 영화 속 오토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정 부분 디지털 사용법도 이해하고 있고, 원하면 적응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여긴다. 이는 실제로 고령자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박탈감’과 유사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디지털 접근성과 활용 능력의 격차를 뜻하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 격차는 단순한 사용법 차이만이 아니라, 정보 격차, 사회 참여 격차, 경제 활동 격차 등으로 확장된다. 오토는 이러한 격차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자동화된 절차, 비대면 통지서, 서류 미비로 인한 접수 거부 등은 그에게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무시당하는 경험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술 기반의 사회적 소외감(Tech-Driven Social Exclusion)으로 설명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토가 이와 같은 저항을 끝까지 유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오토가 극단적인 고립 상태에서 점점 이웃과 연결되면서, 그 안에서 디지털 기술의 효용을 ‘간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마르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오토는 직접 기술을 배우지는 않지만, 자신이 믿는 사람을 통해 기술이 인간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한다. 이는 디지털 기술이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기보다, 신뢰를 통해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토가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이제 내 방식은 더 이상 세상에 필요하지 않다”는 자각이다. 그는 철도 기술자였고,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며, 삶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삶의 태도는 ‘느리다’, ‘비효율적이다’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된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경험보다는 업데이트된 정보, 손재주보다는 기계의 효율성이 우선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토가 느끼는 정체성의 해체는 단지 한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노년층 전체가 경험하는 문화적 위축 현상이다. <오토라는 남자>가 훌륭한 점은, 기술을 찬양하지도, 노인을 희화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디지털 기술과 인간 사이의 ‘중립적 공존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오토는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게 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방식을 선호하고, 변화에는 저항적이다. 그러나 그는 기술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의 손에 기술이 있을 때, 그 효용성을 인정한다. 이는 곧 디지털 사회에서의 포용이란, 기술을 누구에게나 강요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접근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토라는 남자>는 노인의 외로움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 기술의 속도와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오토는 세상의 변화에 분노하지만, 그 변화가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천히 디지털 문명과 타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술은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은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영화는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기술을 똑같이 강요하지 말고,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오토의 변화는 작고 더디지만, 그만큼 진정성 있다. 그리고 그 진정성이 바로, 우리가 디지털 시대에 가장 잊기 쉬운 ‘인간다운 느림’일지 모른다.
3. <오토라는 남자> 속 길고양이가 전하는 정서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 2022)>는 인간관계, 상실, 삶의 회복이라는 클래식한 테마를 따르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정서를 전달한다. 영화 속에서 오토는 퇴직 후 아내를 잃고, 삶의 목적과 연결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닫혀 있고, 자신의 고통을 감추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고립의 서사 속에 조용히, 그리고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길고양이다. 단순한 동물 출연처럼 보이는 이 고양이는, 영화 전체의 감정 곡선을 따라가며 오토의 내면 변화와 정서적 흐름을 시각화하는 도구이자, 감정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이 글에서는 <오토라는 남자> 속 고양이가 지닌 서사적, 심리적, 상징적 의미를 분석하고, 동물 캐릭터가 현대 영화에서 어떻게 인간 감정의 복원을 돕는 장치로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본다.
오토는 질서정연한 일상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규칙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그의 삶에 불쑥 들어온 존재가 바로 이 길고양이다. 고양이는 그의 삶에 '침입'하듯 등장한다. 그 시점은 오토가 자살을 시도하려던 초기 단계로, 정서적 무기력과 죽음 충동의 극단에 가까워진 순간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오토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머물던 균열 지점에 틈을 만든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쫓아내려 했던 오토는 점차 이 동물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귀여움’이나 ‘습관의 결과’가 아니다. 오토는 타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었고, 다시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 정서적 리허설의 대상이 된다. 고양이는 말이 없다. 오토 역시 말수가 적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 오가는 것은 시선, 거리, 침묵의 시간이다. 이 비언어적 교감은 영화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복원'이라는 주제를 미묘하게 구현한다. 고양이는 자극적이거나 노골적인 장면 없이도 오토가 얼마나 외롭고, 또 얼마나 인간적인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심리학적으로도 동물은 ‘무조건적 수용’을 제공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관객은 오토가 고양이에게 말을 걸거나, 살짝 웃는 장면을 통해 그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감정을 말이 아닌 ‘행동’과 ‘관계’로 전하는 영화적 서술 방식이며, 동물 캐릭터가 정서적 반영 장치로서 활용되는 전형적 사례다. 고양이는 단지 오토의 현재만이 아닌,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치유 가능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의 아내 소냐의 죽음 이후, 오토는 심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그에게 감정의 연결은 고통과 직결되며, 따라서 모든 유대는 ‘차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소냐의 흔적을 떠오르게 하는 감정의 통로가 된다. 또한 고양이는 새로운 가족인 마르솔 가족과의 연결 과정에서도 중심에 선다. 마르솔의 아이들이 고양이를 좋아하고, 고양이가 오토의 집뿐 아니라 ‘관계’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오토가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는 시점을 암시한다. 이때 고양이는 오토의 내면을 투사하고 반영하는 거울이자, 심리적 치유의 상징이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고양이는 특정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 전환의 고리로서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동물 캐릭터가 감정의 구조를 지배하거나 이끌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오토라는 남자>는 고양이를 통해 감정의 미세한 변화, 회복의 속도, 정서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오토가 점차 변화할 때마다 고양이는 늘 곁에 있고, 그 존재는 시종일관 조용하지만 견고하다. <오토라는 남자>에서의 고양이는, 단순한 동물 묘사가 아니라 상징적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랜 토리노>, <더 리더>, <패터슨> 등에서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와도 통한다. 고양이는 이러한 동물 상징 체계에서 특히 ‘경계성과 독립성’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인간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곁에 머무는 고양이의 특성은, 변화의 전조이자 감정적 전이의 징후를 시각화하는 데 이상적인 장치다.
<오토라는 남자> 속 고양이는 대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정서적 메시지다. 그는 침묵 속에서 위로하고, 곁에 머물며 감정의 방향을 이끈다. 인간에게 말을 거는 대신, 가만히 다가와 머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요하지만 진실된 소통일지 모른다. 오토는 고양이를 통해 다시 삶을 믿기 시작한다. 상실의 끝에서 다시 손을 뻗는 감정, 폐쇄된 마음이 열리는 과정을 그려내는 이 영화는 고양이라는 동물을 통해 인간이 진짜 원하는 건 말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존재라는 진실을 다시 일깨운다. 이처럼 한 마리 고양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작지만 분명하다.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이유는, 반드시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