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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옥자> 쓸모 있는 생명, 시골 아이의 세계 진출, GMO기업

by borybory-click 2025. 4. 30.

영화 &lt;옥자&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7. 06. 29.
  • 장르: 모험, 액션, 드라마
  • 평점: 8.78
  •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20분
  • 감독: 봉준호
  • 주연: 틸다 스윈튼, 폴 다노, 안서현

 

1. <옥자> 쓸모 있는 생명

영화 <옥자>는 거대한 산업 자본주의와 동물권 문제를 결합시킨 봉준호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와 사회 비판이 집약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동물을 지키는 소녀의 모험담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자본 중심 사회가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옥자>는 ‘쓸모 있는 생명’과 ‘쓸모없는 생명’이라는 무의식적인 구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며, 생명을 가치로 환산하려는 사고방식을 해체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는 동물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어떤 조건이나 효용에 따라 나뉘는 현실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 슈퍼돼지 ‘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산업적 산물이며, 본질적으로는 식용 가축의 범주에 들어간다. 멀티내셔널 기업 ‘미란도’는 이 동물을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식량 자원’으로 포장하며 전 세계 소비자들을 향해 마케팅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옥자는 더 이상 ‘생명’이라기보다는 ‘제품’, 혹은 ‘수익모델’로 재정의된다. 옥자가 살아 있는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험되고, 측정되고, 이동되고, 전시되는 이 모든 과정은 인간 사회가 생명을 얼마나 철저히 경제적 가치로 바라보는지를 드러낸다. 봉준호 감독은 이처럼 생명을 평가하는 잣대를 '쓸모'라는 단어로 요약해 보여주며, 그 관점이 얼마나 잔인하고 일방적인지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풀어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가치 기준이 인간뿐 아니라 생명 전체를 구조적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점이다. 미란도 그룹은 더 많은 고기를 싸게, 빠르게,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 기술을 활용하고, 이 기술은 동물의 고통이나 생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 산업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동물들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존중받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지, 얼마나 적은 사료로 몇 킬로그램이 자라는지를 기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옥자>는 이처럼 '살아 있음'을 존중하지 않는 세계에 맞서, 생명이 가진 내재적 가치를 회복시키려는 서사를 전개한다. 미자는 옥자를 ‘가축’이 아닌 ‘친구’로 인식하며, 그녀의 행동은 옥자의 효용성과 무관하게 그 존재를 지키려는 데 집중된다. 미자의 시선은 철저히 비경제적이며, 옥자가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이 서사는 자본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감정의 논리이며, 효율이 아닌 관계, 가치가 아닌 애정으로 움직이는 윤리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미자는 옥자가 유전자 조작 생명체이든, 얼마의 값이 매겨졌든, 그런 조건들과 무관하게 그 존재 자체를 지키고자 한다. 이처럼 <옥자>는 효용 가치로 판단되지 않는 생명의 존엄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생명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옥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옥자는 미자와 감정을 나누고, 스스로를 지키려 하며, 때로는 다른 동물들을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 이 묘사는 동물이 단지 인간의 도구나 먹잇감이 아니라, 나름의 주체성과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인간이 갖는 생명에 대한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효과를 낸다. 인간만이 사고하고 감정이 있다는 오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옥자>는 ‘비인간 존재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육류 가공 공장의 모습은 인간 중심의 생명 경시 태도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가는 수많은 슈퍼돼지들은 그들의 생명에 어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고기로 처리되기 위한 대상으로만 여겨진다. 그 중에서 단 한 마리, 옥자만이 ‘살 가치가 있다’는 선택을 받는 이 구조는 사실상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살 가치가 있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관객에게 제기한다. 미자의 행동은 그 구조를 잠시 멈추게 하지만, 수천 마리의 슈퍼돼지들은 여전히 시스템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장면은 감동과 비극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구도로 구성되며, ‘한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조차 일종의 자기기만일 수 있다는 뒷맛을 남긴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통해 단지 동물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과 효용성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명관을 전면 비판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고 있는 고기, 음식, 브랜드, 정보들이 얼마나 폭력적인 생명 착취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비자는 광고를 통해 ‘친환경’, ‘윤리적 축산’, ‘착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접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 이면에 감춰진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무관하지 않다. <옥자>는 그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며, 우리의 일상 속 무의식적 선택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옥자>는 쓸모 있는 생명이라는 기준 자체가 허구임을 드러내는 영화다. 모든 생명은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그 존재가 인간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여부는 생명권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이 영화는 그 단순하고도 강력한 진리를 시청각적 언어로, 그리고 감정적 연대로 설득력 있게 펼쳐낸다. 미자가 옥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서사는,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얼마나 절박하고 시급한 일인지 조용하지만 강하게 전한다. <옥자>는 결코 ‘동물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존재가 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강력하고도 감성적인 선언문과 같다.

 

2. 봉준호가 보여준 시골 아이의 세계 진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단지 동물권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만 읽히기에는 그 메시지가 훨씬 더 넓고 입체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구조는 바로 ‘시골 소녀 미자’가 세계적인 거대 기업과 직접 부딪히며,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적 감성이나 문화를 전제로 삼는 데 반해, <옥자>는 강원도 산골의 촘촘한 풍경과 그 속에서 자란 아이의 세계진출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이 설정은 단순한 공간 배경을 넘어서 한국 사회에 고착된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해체 선언이며, 봉준호 감독 특유의 세계관이 반영된 사회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고, 문화, 교육, 경제, 심지어 인간의 ‘성공’이라는 개념조차 서울을 향해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거나, 서울에 올라가야 비로소 인생이 시작된다는 암묵적 서사는 수많은 매체와 영화 속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심지어 시골 출신의 인물이 중심인 경우에도 결국 서울로 진입하거나,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도시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서사가 완성된다. 그러나 <옥자>는 이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미자는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란 소녀이며, 말도 영어도 잘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존재를 위해 세계를 상대로 싸운다. 그 싸움은 도시화된 논리나 권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며, 자연과 연대, 감정과 윤리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영화 초반 미자가 옥자와 함께 산을 뛰놀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장면은 도시적 질서가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생태적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평온한 세계는 글로벌 기업 미란도 그룹의 개입으로 인해 깨지게 되고, 옥자가 끌려가는 순간부터 미자의 여정은 시작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미자가 도시로 향하고, 국제 도시 뉴욕까지 가는 이 모든 여정이 단순한 도시 진입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즉, 미자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도시에 들어가는 것은 도시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자연적 질서와 감정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은 시골 출신 인물이 도시에서 인정받기 위한 ‘성장 서사’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를 변화시키는 ‘저항 서사’로 기능한다. 이러한 구도는 서울이라는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영화의 관습적 배치를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요 사건은 항상 서울에서 벌어지고, 인물은 서울로 이동하며, 서울에서만 변화와 계기를 맞이한다. 이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서사 구조로 자리 잡았으며, 지역은 그저 서울에 대비되는 배경, 혹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공간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반면, <옥자>는 시골을 단지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중심이자 가치의 원천으로 설정하고 있다. 미자가 가진 힘은 서울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옥자와 함께 쌓아온 관계와 감정에서 비롯된다. 그 감정은 미란도의 마케팅 논리, 도시의 냉소주의, 국제 시장의 이해득실을 압도하는 힘을 보여준다. 또한 <옥자>는 세계 무대에 진출한 한국 영화 중에서도 드물게 ‘지방 출신의 인물’이 서사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단지 지역 균형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문화 콘텐츠가 가지고 있던 공간적 편향성을 바로잡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로 배급된 이 영화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더 이상 서울 강남의 카페, 도심의 빌딩, 재벌가의 아파트가 아닌, 진짜 한국의 자연, 강원도의 산, 닭장 옆 비닐하우스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가 세계와 맞서는 이야기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낯설고도 신선하게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봉준호의 탈중심적 서사는 <기생충>에서도 일부 드러나지만, <옥자>에서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미자가 영어를 못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언어적 장벽이 아니라, ‘권력의 언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어를 하지 못해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자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되찾는다. 이는 기존의 도시 중심적 가치 체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진정한 변화는 그 외부에서, 주변에서, 변방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통해 단지 세계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 내부에 내재한 서울 중심주의, 도시 중심주의, 권력 중심주의의 패러다임까지 함께 흔들어놓는다. 이 영화는 시골에서 자란 소녀도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공간의 위계를 해체하고, 존재의 진정성을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영화적 질서를 제안한다. 이는 단지 이야기의 배경이 시골이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골이 오히려 도시보다 더 깊은 윤리와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 감정이 세계를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옥자>는 세계로 확장된 시골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자라는 존재가 있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고, 고등 교육을 받지도 않았으며, 언어 능력도 뛰어나지 않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감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감정은 상품이나 통계, 마케팅이나 이미지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하며, 그 힘은 도시 중심, 권력 중심의 서사를 흔들어놓는다. 봉준호는 <옥자>를 통해 한국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서울이 아니어도 세계와 연결될 수 있고, 강원도 산골에서도 세계를 설득할 수 있으며, 변방에서 중심을 흔들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주변부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남긴다.

 

3. GMO기업의 이미지화 전략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유전자 조작 동물, 일명 ‘슈퍼돼지’를 통해 대중에게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즉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중심축으로 등장하는 가공식품 기업 ‘미란도(Mirando)’는 단순한 악역이나 자본가의 캐릭터가 아닌, 하나의 완성된 브랜드 이미지로 철저하게 연출된 복합체다. 이는 현실 속 GMO 기업들이 소비자에게 신뢰와 안전, 윤리적 가치를 어떻게 설득하려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마케팅 이미지 전략의 실체를 드러내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미란도는 영화 내내 다국적 대기업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브랜드 로고는 깔끔하고 현대적이며, CEO 루시 미란도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혁신적 리더’의 외형을 연상시킨다. 또한 친환경, 지속 가능성, 공정 생산 등의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이 추진하는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고귀한 기술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고자 한다. 이러한 이미지 구성 방식은 실제 현실에서도 GMO 산업이 채택하고 있는 전략과 상당히 유사하다. 많은 GMO 식품 생산 기업들은 기업 웹사이트나 광고에서 ‘기아 해결’, ‘환경 보호’, ‘과학적 진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소비자의 윤리적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옥자>는 이 모든 ‘착한 기업’ 이미지가 얼마나 허위적이고 마케팅 중심적인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루시 미란도는 자신이 이전 세대의 악덕 기업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윤리적 자본가’의 얼굴을 갖기 위해 PR 전략에 집중하고, 대중 앞에서는 감정적인 연설을 통해 기업의 신념을 설파한다. 그러나 영화 속 진실은 전혀 다르다. 옥자를 비롯한 수많은 슈퍼돼지들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잔인한 실험에 노출되며, 결국 도축되는 장면은 기업의 이미지와 실제 운영 방식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지점은 실제 GMO 산업에서도 논란이 되는 지점으로, 홍보와 실제 생산 및 공급 방식 사이의 간극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되어 왔다. 현실에서도 대표적인 GMO 기업 중 하나인 몬산토(Monsanto)는 ‘기술로 인류를 구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식량 위기 해결을 위한 혁신 기업으로 포지셔닝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에서 건강 문제, 종자 독점, 농업 생태계 파괴 등의 이유로 사회적 반발을 받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미지 관리와 PR 전략이 강화되었다. <옥자>의 미란도는 이러한 현실의 GMO 기업들의 이미지를 허구의 공간으로 가져와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보다 더 치밀하게 구성하여 아이러니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결과 관객은 영화 속 허구의 기업을 보면서도 실제 존재하는 GMO 기업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또한 미란도가 진행하는 슈퍼돼지 콘테스트는 현실의 기업들이 채택하는 이벤트 마케팅, 소비자 참여형 캠페인, CSR(사회공헌활동) 전략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각국의 슈퍼돼지가 최종 경연을 통해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개체로 선정되고, 그것을 브랜드화하는 과정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 논리와 같다. 즉, ‘자연’을 인위적으로 설계하고, 그 결과물을 기업 이미지와 결합시켜 대중의 호감을 끌어내는 방식은 실제로도 유전자 조작 기술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을 압축한다. 봉준호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 과학 기술 그 자체보다도, 그 기술을 포장하고 판매하는 방식에 더 깊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옥자>는 기업의 메시지가 어떻게 감정을 조작하고, 윤리를 미화하며, 소비자의 선택을 이끌어내는지를 시각적 언어로 치밀하게 구성한다. 루시 미란도가 펼치는 미디어 쇼, 감성적인 다큐 영상, 슬로건 중심의 메시지는 모두 현실의 광고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도구들이 동물의 고통, 생명 경시, 윤리적 갈등을 어떻게 가려버리는지를 장면마다 노출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사이의 간극을 직면하게 만든다. 이는 정보 비대칭이 극심한 GMO 논쟁 속에서 소비자가 얼마나 쉽게 이미지에 속을 수 있는지를 비판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GMO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옥자>는 기술의 선악을 단정짓기보다는, 그 기술을 둘러싼 ‘의미 만들기’와 ‘상품화 과정’이 얼마나 정치적이며 이익 중심적인지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유전자 조작 생물체 자체보다, 그것을 ‘착한 기술’로 포장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윤리를 조작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구조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과정이, 실제 그 제품이나 서비스의 본질과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또한 미란도의 내부에서도 이중적인 윤리와 혼란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기업 내에서는 동물의 생명보다 데이터와 성과가 우선시되고, 일부 직원은 동물 학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구조적인 순응을 선택한다. 이처럼 기업 구조 안에 존재하는 ‘윤리의 파편’들은 단일한 악이 아니라, 복합적인 책임과 무력감의 문제를 내포한다. 이는 실제 GMO 기업의 운영 구조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양상으로, 연구자, 마케터, 관리자, 투자자 각각이 맡은 역할에 따라 도덕적 거리두기가 발생하며,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분산된다. <옥자>는 이를 한 사람의 악행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합작으로 묘사함으로써, 윤리적 소비와 기업의 역할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옥자>의 미란도는 단순한 허구의 악역 기업이 아니라, 현실의 GMO 기업들이 구축해온 이미지 전략의 정수를 집약한 캐릭터다. 친환경, 지속가능성, 인간애, 사회공헌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수많은 PR 전략은 실제로는 얼마나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는지를 영화는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GMO 기술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거나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봉준호 감독은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을 통해 돈을 벌려는 자본의 언어가 얼마나 이중적이며 조작적인지를 시각적 서사로 풀어낸다. <옥자>는 기술을 소비하는 사회가 그 기술을 둘러싼 말과 이미지까지도 소비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 이면의 윤리를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단지 GMO라는 개념만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랐던 ‘착한 기업’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