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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육체와 영혼, 사슴 꿈, 병원 장면

by borybory-click 2025. 9. 20.

영화 &lt;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7. 11. 30.
  • 장르: 드라마, 멜로
  • 평점: 8.03
  •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 러닝타임: 116분
  • 감독: 일디코 엔예디
  • 주연: 게자 모르산이, 알렉상드라 보르벨리

 

1.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속 육체와 영혼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육체와 영혼을 별개로 느낀다. 몸은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을 때가 많다.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이 분리를 정면에서 마주한다. 육체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영혼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진정한 만남을 갈망한다. 이 작품은 그 미묘한 틈새, 즉 육체와 영혼이 따로 노는 상태에서 점차 하나로 엮여가는 과정을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담아낸다.

영화의 배경은 정육 공장이다. 차가운 철제 기계 소리, 사람과의 대화 없는 고요한 노동, 그리고 서로를 마주치지 않는 눈빛. 이 공간은 ‘육체만 존재하는 삶’을 은유한다. 인간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일상은 반복된다. 주인공 마리아는 이 공장에서 품질관리자로 일한다. 그녀의 말투는 건조하고, 감정 표현은 서툴다. 자폐적 특성이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육체와 영혼의 괴리에서 비롯된 첫 번째 균열이다. 그녀의 상대역인 엔드레는 육체의 결핍을 지닌 남자다. 사고로 한쪽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표현이 없는 중년 남성이지만, 그 또한 외로움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공장에서 마주쳐도 대화가 없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꿈속에서 이들은 사슴이 된다. 광활한 설원 위를 걷는 두 마리의 사슴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눈빛과 움직임, 서로를 향한 존재의 인식만으로 충분히 교감한다. 이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인간 내면 깊은 곳,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연결의 방식이다. 꿈속에서 이들은 자신을 꾸미지 않고,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육체는 이성적 판단과 사회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만, 영혼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며 무엇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처럼 영화는 현실의 육체와 꿈속의 영혼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면서, 두 세계의 간극을 차분히 쌓아간다. 꿈이라는 비현실적 공간을 통해 영혼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고, 현실의 차가움 속에서 육체가 얼마나 많은 방어기제를 두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두 구조는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서히 접점을 찾는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마리아는 변화한다. 스스로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애쓴다. 엔드레도 처음엔 놀라지만, 그 변화를 따뜻하게 지켜본다. 마리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 변화는 사소하지만 뚜렷하다. 식사를 함께하고, 전화번호를 묻고, 상대의 취향을 파악한다. 육체는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영혼이 연결된 상태에선 그 모든 어색함도 의미를 갖는다. 이때부터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을 막는 장벽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를 표현하는 도구로 자리 잡는다. 즉, 육체와 영혼이 이중으로 분리되어 있던 상태에서 서서히 하나로 통합되는 전환점이 형성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마리아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이 이중구조가 극한으로 치닫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녀는 영혼은 연결되어 있는데, 현실에서 육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육체가 감정의 통로가 되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외로울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 엔드레의 감정이 터져 나오면서 육체와 영혼은 마침내 조우한다. 이 만남은 육체적 접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숨결을 느끼는 순간에 이르러, 비로소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육체와 영혼의 이중구조는 철학적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상에서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종종 감정을 숨기고, 욕망을 억누르고, 관계를 포장한다. 즉, 육체는 사회적 틀에 맞춰진 ‘외형’이고, 영혼은 그 틀 너머의 진짜 나 자신이다. 영화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진정한 연결은,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에 도달한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이 주제를 강요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사가 적고, 음악도 거의 없으며, 사건도 격렬하지 않다. 하지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되고, 그들의 변화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건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자극이 아니라, 영혼 깊숙이 자리한 어떤 감각을 건드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면서도 공통된 여운을 남긴다. 육체와 영혼이 일치할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쩌면 진부할 수 있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장면으로 느끼게 한다. 그 진심이 관객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 철학적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현대 사회는 ‘보이는 육체’에 치중한다. SNS, 외모지상주의, 경쟁 중심의 일터 문화 모두 인간을 외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그런 환경 속에서 영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그 잊힌 목소리를 다시 꺼내어 묻는다. 당신은 지금 ‘진짜 나’와 연결되어 있는가? 당신의 사랑은 육체적 소유인가, 영혼의 교감인가?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해답은 단순하다. 내 안의 영혼과 먼저 연결될 때, 타인과도 진짜로 연결될 수 있다.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삶을 바라보게 한다.

 

2.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사슴 꿈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큰 질문을 관통한다. 인간은 정말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지만,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으로 구현된 장면은 바로 꿈속에서 등장하는 두 마리 사슴의 이미지다. 이 꿈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다. 영화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이자, 인간 내면의 갈망을 시각화한 압축적 메타포다. 현실 세계에서 서로 낯설고 조심스럽게 마주하는 두 주인공은 꿈속에서만큼은 완전한 평화 속에서, 조건 없이 교감한다. 이 사슴 꿈은 단순히 ‘꿈’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인간의 감정 구조와 연결 욕구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상징화한다.

꿈의 시작은 정적이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숲, 깊은 고요함, 그리고 갑자기 등장하는 사슴 한 쌍. 이 사슴들은 서로를 바라보거나 부드럽게 가까워지며 움직이는데, 어떤 말도 소리도 없다. 그 침묵 속에 오히려 더 큰 감정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원초적 상태, 즉 사회적 역할이나 조건이 붙기 전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상징한다. 사슴은 자연 속에 놓여 있으며, 인간 세계의 소음과 충돌이 없다. 이 점은 두 주인공의 꿈이 현실의 연장선이 아니라, 영혼이 존재하는 순수한 차원의 시공간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사슴이라는 동물 자체가 갖는 상징성도 흥미롭다. 동양에서는 사슴이 장수를 상징하거나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서양 신화에서도 순결하고 평온한 이미지를 지닌 동물로 자주 등장한다. 무엇보다 사슴은 날카롭거나 공격적이지 않다. 부드럽고, 민감하며,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특성은 영화 속 두 인물의 감정적 성향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다. 마리아는 자폐 스펙트럼에 가까운 섬세함과 예민함을 가진 인물이고, 엔드레는 겉으로는 무덤덤하지만 내면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현실에서는 수많은 장벽에 막혀 서로 다가가지 못하지만, 꿈속에서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이는 사슴이라는 동물이 가진 비폭력적이며 직관적인 관계 방식과 닮아 있다. 사슴 꿈의 구조는 반복된다. 영화는 이 꿈 장면을 여러 차례 삽입함으로써 단순한 ‘몽환적 장면’이 아닌 감정의 서사를 병행하는 평행 구조를 만든다. 꿈속에서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현실에서의 관계도 조금씩 변한다. 마리아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을 의식하게 되고, 엔드레는 말 없는 교감에서 위안을 느낀다. 즉, 사슴 꿈은 주인공들이 스스로 감정을 깨닫고, 진심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꿈은 현실을 회피하는 탈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감정의 연습장으로 기능한다. 이 구조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리듬감 있게 설계한 정교한 서사 구조의 일부다. 또한 이 꿈은 두 인물 간의 ‘연결’을 상징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다. 인간은 보통 언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언어는 종종 감정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를 만든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속 사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고, 함께 움직인다. 이건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형태다. 조건 없는 교감, 평가 없는 수용, 그리고 침묵 속의 연결. 이 영화가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이처럼 비언어적이며 본질적이다. 꿈이라는 공간은 이 두 인물이 살아가는 현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정육 공장은 무기질적이며 반복적인 공간이고, 인간의 온기보다는 기계적 효율성이 강조된다. 반면, 꿈의 숲은 따뜻한 빛과 자연의 질감으로 가득하다. 이 두 공간의 대비는 육체와 영혼, 현실과 이상, 고립과 연결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다시 말해, 사슴 꿈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진짜 삶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장치다. 현실에서는 많은 벽과 조건에 가로막히지만, 꿈속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건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선 존재적 위로에 가깝다. 감독 일디코 엔예디는 이 사슴 꿈 장면을 아주 조심스럽게 연출한다. 과도한 감정 과잉이나 설명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이미지와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는 관객에게 ‘느끼는 것’ 그 자체를 유도한다. 영화적 상징은 설명되는 순간 힘을 잃는다. 반대로,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사슴 꿈은 느낌으로만 받아들여지기에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건 매우 문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연출법이며, 상업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 꿈은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아름다웠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여운과 감정이 남는다. 사슴은 또한 거울과 같은 존재다. 관객은 꿈속의 두 사슴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투영하게 된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와 조건 없이 연결되고 싶다는 본능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건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시각적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감정의 반향.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그 힘을 가장 섬세하고 조용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사슴은 단지 꿈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추구하는 사랑, 이해, 연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심’의 상징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꿈이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반복은 영화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준다. 하나는 리듬이고, 다른 하나는 강조다. 반복되는 사슴의 꿈은 관객에게 무의식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이건 감독이 강요 없이 감정을 밀어 넣는 방식이다. 반복을 통해 관객은 점차 그 꿈의 세계가 주인공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은 그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외부 껍질에 불과하며, 진짜 정체성은 꿈에서 구현된다. 이는 예술영화가 지닌 가장 깊은 미학 중 하나다. 겉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것. 사슴의 반복은 바로 그 감정의 뿌리를 따라가게 만든다. 현실에서의 갈등, 오해, 두려움, 표현의 미숙함은 모두 꿈의 순수함과 대비되며 결국 두 사람을 변화시킨다. 꿈이 먼저이고, 현실이 따라간다. 사슴의 꿈은 그래서 플롯의 배경이 아니라, 이 영화를 이끄는 감정의 나침반이다. 마치 관객도 꿈을 꾸는 듯한 감각을 주는 이 장면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오래도록 남아 한동안 일상에 스며든다. 나 또한 저런 순수한 연결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결국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사슴은 그 희망의 화신이다.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단단하게 인간의 내면을 두드리는 존재. 인간은 말보다 눈빛, 소리보다 감정, 행동보다 마음으로 연결되고 싶어 한다. 그 진심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꿈의 의미다.

 

3.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속 병원 장면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는 현실과 꿈, 육체와 영혼, 침묵과 연결 사이의 섬세한 긴장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장면 하나하나에는 강력한 상징과 은유가 내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병원 장면은 전체 영화의 정서를 뒤흔들고 인물의 내면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상징적 순간으로 기능한다. 단순히 의료적 공간이 아닌, 심리적 재탄생의 장소, 혹은 감정 회복의 은유로 해석되는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병원은 보통 신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병원은 단지 육체적 회복의 공간을 넘어서, 영혼의 깊은 통증을 마주하고 치유받는 곳으로 등장한다. 마리아가 자살을 시도한 후 입원하게 되는 병원은 그녀의 내면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살 시도는 단순히 실패한 로맨스에 대한 절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자신을 타인과 단절시키며 살아온 마리아가, 드디어 감정의 문을 열었으나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는 극단적인 무력감과 고립의 표현이다. 그런 그녀가 병원에 있는 동안,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자신을 돌보는 계기를 맞는다. 병원은 영화 속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로 그려진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공간은 마리아가 감정의 극단에서 다시 중심을 찾는 장소다. 하얀 침대 시트, 정돈된 병실, 절제된 조명 등은 현실을 재정비하는 공간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자궁 같은 이미지로 읽힌다. 이 병원에서 마리아는 외부와 단절된 채 완전히 혼자가 된다. 그러나 그 고립은 더 이상 외로움이 아니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차단했지만, 이제는 타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 후의 고요한 혼자임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이처럼 그녀가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구성되는 감정적 재편성의 공간이다. 이 장면이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그 직전의 감정선 때문이다. 마리아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오해와 거절,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녀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자살 시도는 단순한 죽음을 향한 충동이 아니라, 더 이상 감정의 세계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 반응이다. 그만큼 그녀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런 그녀가 병원에 누워 깨어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속에 묘한 결의가 있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겠다는, 삶을 다시 붙잡아보겠다는 감정이 스며 있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음악이나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공간 자체의 정서로 감정을 이끌어낸다. 침묵, 조명, 인물의 눈빛 등 비언어적 요소가 감정 전달의 핵심이 된다. 이는 영화 전반의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말보다는 눈빛, 설명보다는 상징, 사건보다는 분위기. 그런 연출 방식 속에서 병원은 일종의 정화(淨化)의 장소가 된다. 마리아는 병원에 들어가 이전의 자신을 버리고, 병원에서 나와서는 새로운 감정의 세계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병원은 그녀가 감정적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상징적인 터널인 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병원 장면 이후 마리아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전의 마리아는 철저하게 규칙적이고, 감정을 통제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러나 병원을 거쳐온 후 그녀는 엔드레에게 먼저 다가가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꿈에서만 연결된 사슴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를 느끼고, 이해하며, 사랑하려는 인간으로 변해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각성이 아니다. 정신적 치유 과정을 통과한 결과물이다. 병원 장면은 바로 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심리적 전환점이다. 또한 이 장면은 영화의 제목인 "On Body and Soul"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신체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공간이다. 육체는 다치고 치료받는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진짜 회복되는 것은 영혼이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정신적인 것으로만 여기지만, 이 영화는 감정 또한 몸을 통해 체화되고, 몸을 통해 치유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준다. 마리아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녀의 손목은 피로 물들지만, 그 상처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붕괴, 인간관계의 단절, 자기혐오까지 포함된 총체적인 감정의 무너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병원은 그런 복합적인 상처가 다시 구성되는 장소다. 마지막으로 병원 장면은 관객의 감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객은 마리아의 절망과 두려움을 경험하며, 그녀의 회복을 함께 목격한다. 그래서 이후 그녀가 엔드레와 다시 만나는 장면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탄생처럼 느껴진다. 이 감정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와닿는 이유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휴식’이나 ‘치료’의 장소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감정 흐름을 반전시키는 핵심 상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병원을 일상적인 공간으로 묘사하면서도, 철저하게 상징화된 시선으로 바라본다. 병실의 하얀색, 간호사의 차분한 말투, 그리고 창 밖으로 들어오는 빛. 이 모든 요소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리아가 새로운 감정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처 입은 몸을 감싸는 이 조용한 공간은, 결국 감정을 회복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를 되찾게 해주는 안전지대다. 현실적으로는 병원이지만, 은유적으로는 감정의 무게를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방과 같다.

이렇듯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에서 병원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내면을 시각화한 공간이며, 인간이 상처를 직면하고,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병원은 상처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며, 고립의 공간이자 새로운 연결의 시작점이다. 이 모든 의미가 압축된 이 장면은 영화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응축하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감정, 관계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