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 2018. 05. 03.
- 장르: 드라마
- 평점: 7.32
- 등급: 전체 관람가
- 러닝타임: 115분
- 감독: 토드 헤인즈
- 주연: 줄리안 무어, 오크스 페글리, 밀리센트 시몬스, 미셸 윌리엄스
1. <원더스 트럭>의 아날로그 매력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편리해졌다. 손 안의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시대,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무한히 소비되는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변해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감정의 여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은 바로 그런 디지털 시대에 던지는 감성적인 질문이다. 이 영화는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 느림의 미학, 그리고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감동’이 어떤 것인지를 잔잔한 영상미와 독특한 구성으로 전달한다.
<원더스트럭>은 1927년과 1977년이라는 두 시대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아이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준다. 벤은 1977년의 미네소타에서 엄마를 잃은 후 뉴욕으로 향하고, 로즈는 1927년 뉴저지에서 도망쳐 나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좇는다. 공통적으로 두 인물 모두 청각장애를 겪고 있으며, 누군가를 찾고 싶은 강렬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 영화는 흑백과 컬러, 무성영화 스타일과 현대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넘나들며, 시대를 초월한 감정을 이야기한다. 디지털 기술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연출이 오히려 지금의 관객에게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특히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정보의 접근 방식’이다. 오늘날 디지털 세대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쉽게 주어진다. 검색창에 단어 하나만 입력해도 수많은 정보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 그러나 <원더스트럭> 속 아이들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발로 뛰고, 물리적인 공간을 직접 탐색하며, 책과 사진, 박물관 자료를 통해 단서를 찾는다. 벤이 박물관에서 하나하나 단서를 찾아가며 어머니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은 지금 시대라면 단 30초 만에 구글로 해결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느린 여정 속에서 벤은 단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감정을 되짚고, 인생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내면적으로도 성장한다. 로즈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간절함으로 뉴욕을 걸어 다니며 정보를 ‘직접’ 보고, ‘직접’ 느낀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영화배우 리리안 메이휴이며, 그 배우의 삶을 통해 로즈는 자신과 가족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무성영화 시대를 재현한 로즈의 이야기에서는 자막과 화면의 움직임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이 사용된다. 이는 스마트폰 자막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그만큼 감정의 전달이 더 깊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대사가 없이도 표정과 움직임만으로 전달되는 슬픔, 기대, 실망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원더스트럭>이 가진 아날로그적인 매력은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1977년의 장면들은 약간 흐릿한 필름톤과 따뜻한 컬러감으로 표현되며, 도시의 소음과 낡은 건물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반면 1927년의 장면은 고전 무성영화 스타일의 흑백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시대적인 거리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로즈의 세계가 얼마나 조용하고 고요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디지털 필터나 CG에 의존하지 않고, 필름의 물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아날로그 감성을 촘촘히 녹여낸다. 현대의 영상 콘텐츠는 대부분 빠른 편집, 자극적인 음악, 과도한 시각 효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감정이 채 차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정보가 쏟아진다. 하지만 <원더스트럭>은 다르다. 이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오래 머문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물 하나, 도시를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 천장을 올려다보며 느끼는 낯선 공간의 분위기. 이런 것들이 모여 관객의 감정을 천천히 두드린다. 바로 이 점이 아날로그 영화의 매력이자, <원더스트럭>이 오늘날 디지털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감성 자극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연결’이라는 주제를 매우 따뜻하게 풀어낸다. 로즈와 벤은 시간적으로는 50년 이상 떨어져 있지만, 공통된 주제와 감정을 통해 하나의 서사로 엮인다. 두 아이는 모두 외롭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며, 세상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단지 지식의 저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 기억과 진실이 이어지는 매개로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처럼 단절과 속도가 만연한 사회에서 진정한 연결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원더스트럭>은 기술이 없던 시대를 미화하거나 복고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아날로그적 방식의 삶이 가지는 깊이와 감정을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느린 여정 속에 숨겨진 감정의 층, 소리를 잃었지만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울림, 그리고 손끝으로 만지고, 눈으로 바라보는 삶의 조각들. 이 영화는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직접 느껴보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종종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느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천천히 다가올 때 더 오래 남는다. <원더스트럭>은 그런 점에서, 지금 시대에 더욱 가치 있는 영화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한 장면 한 장면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면, 이 영화가 주는 감정의 깊이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 감성은 디지털 세대가 어쩌면 놓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2. <원더스 트럭> 속 청각장애 표현 방식
영화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은 단순히 두 아이의 성장 이야기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독창적인 영화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 구조로 풀어내며, 그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런데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서사 구조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청각장애를 가진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전례 없는 시네마틱 실험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보기 드문 무성영화의 재현, 소리의 부재 속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시각적 언어, 그리고 음향 설계의 전략적인 사용 등 <원더스트럭>은 영화 언어로서의 '청각'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청각장애라는 주제는 영화에서 흔히 다뤄지는 소재는 아니다. 더구나 이 주제를 표현할 때 대부분의 영화는 인물의 대사나 상황 설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더스트럭>은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영화는 1927년을 배경으로 한 로즈의 이야기를 아예 ‘무성영화 스타일’로 구성했다. 그녀는 선천적인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외부 세계와 소통이 단절된 채 살아간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로즈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대사 없이, 자막과 음악, 배우의 표정과 움직임만으로 장면을 끌고 나간다. 이런 방식은 단순한 콘셉트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관객에게도 ‘청각을 잃는 경험’을 체험하게 하며, 장애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감각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섬세한 설계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네마틱 실험은 바로 사운드의 활용과 배제이다. 보통의 영화는 음악과 효과음, 대사를 중심으로 감정을 구성한다. 하지만 <원더스트럭>의 로즈 파트는 전통적인 소리 기반의 영화 문법을 거의 철저히 배제한다. 예컨대 군중이 붐비는 뉴욕 거리에서도 로즈의 시점에서는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적인 영상으로만 구성된다. 이 무음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긴장감과 몰입감은 때때로 대사나 음악보다 더 강력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관객은 마치 자신이 청각을 잃은 듯한 상태로 로즈와 함께 뉴욕 거리를 걷고, 배우의 눈빛과 손짓만으로 의미를 유추한다. 이로써 영화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 '경험' 그 자체를 제공한다. 무성영화 시절을 재현한 흑백 영상은 단지 형식적인 기교에 그치지 않는다. 이 흑백 스타일은 로즈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컬러 없이 구성된 세계는 감정의 경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며, 현실과 감정 사이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무성영화의 고전적 연출기법을 차용함으로써, 시대적 배경과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이는 로즈가 살던 1920년대에는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얼마나 고립된 삶이 강요되었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반면, 1977년의 벤 파트에서는 또 다른 청각장애의 표현이 등장한다. 벤은 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청력을 잃은 소년이다. 그의 이야기는 컬러 영상으로 구성되며, 배경음악과 사운드가 적절히 섞여 있다. 하지만 청각을 잃은 이후의 벤은 소리 없는 세상에서 혼란과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감독은 카메라의 초점, 음향의 차단, 배경음의 억제를 통해 벤의 감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깨어난 벤이 주변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 입술 움직임만으로 사람들의 말을 유추하려는 장면은 감정을 극도로 응축시킨다. 벤의 세계는 컬러풀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이 대비는 같은 청각장애라도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의 경험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시각적 리듬을 통해 청각의 부재를 메운다. 사운드 대신 이미지의 움직임, 프레임의 속도, 인물의 시선과 표정 변화에 관객은 더 민감해진다. 이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보는 예술’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원더스트럭>은 이 원초적인 영화적 감각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소리가 없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오히려 감정은 더 진하게 전달된다. 로즈가 도심을 걷는 장면에서 배경음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고립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들고,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해설도 없고, 자막도 거의 없는 이 장면은 감정의 ‘추론’을 요구하면서, 감정 이입을 훨씬 깊이 유도한다. 이 영화의 사운드디자인 또한 매우 치밀하다. 로즈의 파트에서는 음악이 극의 분위기를 리드하며, 장면마다 테마가 설정되어 있다. 피아노 선율,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음악,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음계는 관객에게 무성영화 시대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반면, 벤의 파트에서는 사운드의 단절과 회복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청각의 중요성과 상실감을 극대화한다. 벤이 박물관에 도착해 자신이 찾고자 했던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음향은 다시 점진적으로 회복되며, 그 감정은 단지 시각적 연출이 아니라 청각적 감각의 회복으로도 표현된다. 이처럼 음향을 감정의 기복에 따라 ‘부재와 존재’라는 개념으로 다룬 연출은 매우 실험적이면서도 효과적이다. <원더스트럭>은 단지 청각장애를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하나의 감각 실험이며, 장 애를 바라보는 시각적/청각적 인식에 도전장을 내민 작품이다. 특히 현대 영화가 디지털 기술과 과도한 사운드, 시각 효과에 의존하는 시대에, <원더스트럭>은 오히려 감각을 최소화함으로써 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한다.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청각의 소중함, 그리고 소리가 없을 때 더욱 또렷해지는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청각장애를 단지 불편함이나 결핍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청각의 부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법, 사람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그리고 감정을 느끼는 깊은 층을 제시한다. 로즈와 벤은 모두 말이 없지만, 그들의 눈빛, 손끝, 행동 하나하나가 진심을 전달한다. 우리는 소리를 잃은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듣게 된다. 영화가 청각장애를 표현하는 방식이 탁월한 이유는, 바로 이런 ‘감정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감정은 살아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감정을 말이 아닌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다. <원더스트럭>은 바로 그 영화적 가능성을 증명해 낸 작품이며, 청각장애라는 주제를 가장 깊고 넓게 풀어낸 보기 드문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3. <원더스 트럭> 흑백촬영이 주는 시각적 감동
영화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은 서사 구조, 주제, 감정 표현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연출 방식은 1927년을 배경으로 한 흑백 무성영화 파트이다. 이 파트는 단순히 시대 배경을 반영하기 위해 흑백으로 촬영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청각적 감정을 구성하는 핵심 도구이며, 관객의 감성을 직접 건드리는 중요한 시각적 장치다. 특히 이 영화의 흑백 촬영은 단순한 영상 기법이 아니라, 하나의 영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현대 영화 속에서 보기 드물게 ‘무성영화의 미학’을 되살린 <원더스트럭>은 흑백의 정적이고 섬세한 화법을 통해, 감정을 더욱 깊고 조용하게 전달한다.
<원더스트럭>은 두 명의 아이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한 명은 1977년의 소년 벤이고, 또 한 명은 1927년의 소녀 로즈다. 로즈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촬영되었으며, 사운드 없이 자막과 음악으로만 전개된다. 이러한 무성영화 스타일의 연출은 로즈가 선천적인 청각장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녀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소리’가 제거된 상태로 구현되며, 그 세계는 오롯이 ‘빛과 그림자’만으로 표현된다. 흑백 영상이 주는 가장 강렬한 인상은 바로 감정의 정화다. 컬러가 배제된 장면에서는 불필요한 시각적 자극이 줄어들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표정, 눈빛, 손동작 등에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제한된 표현 속에서 오히려 더 섬세하고 깊이 있는 감정이 전달된다. 특히 밀리센트 시먼즈가 연기한 로즈의 눈빛은 흑백 영상 속에서 더욱 빛난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은 오직 얼굴의 근육, 눈동자의 움직임, 몸짓 하나하나로 전해진다. 흑백이라는 한정된 색의 세계가 오히려 감정의 순도를 높여주는 것이다. 또한 흑백 촬영은 시대적 분위기와의 조화 측면에서도 탁월하다. 1920년대 미국은 무성영화의 전성기였고, 시네마가 이제 막 대중의 예술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원더스트럭>은 그 시대의 미장센과 톤을 완벽하게 복원해 낸다. 뉴저지의 고풍스러운 거리, 뉴욕의 붐비는 거리, 극장, 박물관 등 모든 공간은 흑백 톤 속에서 묵직하고 고전적인 정서를 풍긴다. 컬러보다 흑백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복잡하지 않기에 더 강렬한 것, 바로 이것이 흑백 영상이 주는 미학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이 영화에서 무성영화 시절의 영상미를 고스란히 재현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한 복고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는 흑백 촬영을 통해 현대적인 감정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로즈가 도시를 도망쳐 나와 혼자 지하철을 타고 뉴욕 시내를 헤매는 장면은 매우 고요하지만 그 안에 엄청난 감정의 폭풍이 일어난다. 흑백 화면은 도시의 소음을 제거하면서, 로즈의 내면을 강조한다. 건물의 그림자, 창밖을 비추는 빛의 굴절, 인물과 사물의 대비—이 모든 시각 요소는 흑백 톤에서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감정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연출은 시청각의 균형을 깨는 실험이기도 하 다. 현대 영화는 대부분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과도하게 작동하며, 관객에게 빠르고 자극적인 감정을 선사한다. 반면 <원더스트럭>의 흑백 파트는 시각만으로 감정을 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 부여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관객은 흑백 화면을 따라가면서 ‘소리 없는 감정’을 듣게 된다. 이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다. 또한 흑백 영상은 영화의 메타포적 층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로즈가 살아가는 세계는 실제로도 그렇지만, 정서적으로도 폐쇄된 세계다. 그녀는 소통이 단절되어 있고,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 흑백 화면은 이러한 심리적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선명한 영상 속에서, 로즈는 언제나 혼자이며, 외부 세계는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 때때로 그녀의 얼굴은 반쯤 어둠에 가려져 있고, 공간은 끝없이 낯설게 다가온다. 이런 화면 구성은 그녀의 불안과 고립감을 시청각이 아닌 ‘시각’ 하나로 정확하게 전달해 낸다. 감독은 이러한 흑백 톤을 단순히 배경의 선택이 아닌 정서의 도구로 사용한다. 컬러가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면, 흑백은 감정을 여운으로 남긴다. 로즈가 거리를 걷는 장면, 박물관에서 미로처럼 이어지는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장면, 배우 메이휴를 따라가는 장면 등 모든 순간은 흑백이라는 필터 속에서 감정의 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관객은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인물의 움직임과 정지된 순간 속에서 읽어내게 된다. 한편, 영화는 벤의 이야기에서는 컬러로 전환된다. 이 대비는 시간의 흐름뿐 아니라 감정의 결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벤은 청각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었고, 여전히 세상의 소리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의 세계는 컬러풀하지만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반면 로즈의 세계는 오래된 기억처럼 정리되어 있고, 고요하고, 때로는 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두 아이의 감정 상태는 흑백과 컬러의 대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이 시각적으로도 인물의 내면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원더스트럭>의 흑백 촬영은 단지 미장센의 일부가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하나의 주체로 기능한다. 로즈가 들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관객은 오직 눈으로만 그녀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은 단순한 영화 감상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감정 여행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화면이 종료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흑백은 때로는 불편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더스트럭>은 그 불편함을 감정의 공간으로 바꾸어낸다. 빛과 어둠, 선명함과 흐릿함, 정적과 긴장—all of it combined into a visual language that transcends time. 이 영화가 오늘날처럼 컬러와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흑백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조용히 그리고 깊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더스트럭>은 그 목적을 완벽히 달성했다. 흑백 화면 속 로즈의 여정은 시대를 넘어선 공감을 이끌어내며, 관객에게 아날로그 영화의 진짜 매력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이 감성은 디지털의 빠른 리듬 속에서 놓치기 쉬운 ‘느림과 집중’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원더스트럭>의 흑백 촬영은 단지 시각적 기법이 아니라, 오늘날 영화가 다시 돌아봐야 할 감성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