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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플래쉬> 음악을 위한 희생, 음악과 권력의 관계, 승리인가 패배인가

by borybory-click 2025. 2. 22.

영화 &lt;위플래쉬&gt; 관련 사진

 

영화 <위플래쉬>는 뉴욕의 명문 음악 학교에 다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드러머 앤드류가 완벽을 강요하는 플래처 교수에게 폭언과 폭력을 당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결국 광기와 집념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 글에서는 음악을 위해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영화 속에서 음악과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앤드류가 교수를 뛰어넘는 연주를 선보이는데 그것은 승리인지, 패배인지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1. 음악을 위한 희생

영화 위플래쉬는 예술가가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앤드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잠, 인간관계, 건강, 심지어 자신의 정신까지 모두 내던진다. 플레처의 혹독한 교육 방식 속에서 그는 정상적인 삶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정도의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예술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할지 살펴보자. 앤드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는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연애를 포기하며,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면서 연습에 몰두한다. 영화 속에서 이런 희생은 ‘진짜 재능 있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플레처는 "나는 위대한 음악가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학생들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정말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을까?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엄청난 희생을 감내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고, 반 고흐는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이들의 사례는 예술적 성공이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이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낭만적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앤드류의 희생은 단순한 노력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연습을 위해 잠을 줄이고, 손이 찢어지고 피가 나도록 드럼을 친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도 무대에 올라가려 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헌신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건강과 정신을 망가뜨릴 가능성이 크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존재한다. 스포츠 선수들이나 발레리나처럼 극한의 신체적 훈련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부상이 잦고, 음악가들 역시 과도한 연습으로 인해 신체적 손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심리적으로도 예술가들은 창작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극단적으로 경험하며, 이는 정신 질환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앤드류의 경우처럼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결국 자신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술적 성공이 중요하다고 해도,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완전히 망가진다면 그 성취가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술적 성공과 삶의 균형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극단적인 희생 대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일정한 휴식을 취할 때 창의성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실제로 하루 12시간씩 연습하는 것보다, 적절한 휴식을 병행하며 연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플레처처럼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원과 격려를 통해 성장하는 예술 환경이 필요하다. 경쟁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극단적인 압박보다는 협력적인 방식이 창작 과정에서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음악가나 예술가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으려면 정신 건강이 필수적이다. 현대의 많은 창작자들은 명상, 운동, 심리 상담 등을 통해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한다. 영화 속 앤드류는 결국 균형을 찾지 못했다. 그는 플레처의 방식에 순응하며, 인간관계를 모두 단절한 채 드럼 연주에 몰입한다. 하지만 만약 그가 더 건강한 환경에서 음악을 배웠다면, 위대한 드러머가 되면서도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위플래쉬는 예술을 위한 희생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다. 앤드류가 위대한 드러머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결국 인간적인 관계와 자신의 내면을 희생했다. 우리는 예술이 단순한 집착과 고통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2. 음악과 권력의 관계

영화 <위플래쉬>의 가장 강렬한 인물은 단연 플레처다. 그는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들을 배출한 교수이자, 학생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냉혹한 스승이다. 그는 앤드류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육체적 폭력을 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의 교육 방식은 단순한 학대가 아니라, 학생들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유도하는 독특한 시스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플레처는 정말 학생들에게 필요한 스승일까, 아니면 폭력과 공포로 권력을 유지하는 가해자일 뿐일까? 플레처는 학생들에게 평범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전설적인 연주자’만을 인정하며, 그들이 될 수 있도록 가혹한 방식으로 몰아붙인다. 그의 교육 철학은 간단하다. 학생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면, 그들 중 일부는 성장하고, 일부는 무너진다. 완벽한 연주가 나올 때까지 끝없이 훈련시킨다. 학생들이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게 만들면, 더 집중할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플레처의 혹독한 훈련 덕분에 앤드류는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가진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이 정말 효과적인 교육일까? 플레처의 방식이 효과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교육법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그리고 그의 목표가 정말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진정한 스승이라면 학생의 발전을 우선해야 한다. 하지만 플레처는 학생의 성공보다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그는 과거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언급하며, 자신도 그런 거장을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 중 상당수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음악을 포기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앤드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그는 플레처의 교육 방식에 의해 극단적인 연습을 반복하고, 결국에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까지 연주를 시도한다. 이것이 과연 건강한 교육일까? 플레처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대신, 조롱하고 굴욕을 준다. 그는 학생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켜, 그것을 연습으로 승화시키도록 만든다. 그러나 예술이란 단순히 기술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감정과 창의성이 중요한 영역이다. 공포 속에서 창의성이 자랄 수 있을까?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창의적인 성과는 긍정적인 환경에서 더 많이 발휘된다고 한다. 공포와 스트레스는 단기적으로 집중력을 높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번아웃과 정신적 문제를 유발한다. 플레처의 방식은 단기적인 결과를 만들지만, 학생들의 장기적인 성장에는 해가 될 수 있다. 앤드류는 영화 후반부에서 플레처를 뛰어넘는 연주를 선보인다. 앤드류는 마지막 공연에서 플레처를 조종하려 한다. 즉, 플레처의 틀을 깨고 자신이 무대의 주도권을 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플레처가 원하는 완벽한 연주를 하고 있다. 결국 그는 플레처의 방식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성장했다. 앤드류는 연주 실력은 극대화했지만, 인간적인 삶을 포기했다. 플레처의 방식은 ‘천재적인 연주자’를 만들어냈지만, 앤드류의 행복이나 인간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았다. 결국, 플레처는 위대한 스승이라기보다는, 강압적인 시스템 속에서 학생을 몰아붙여 결과를 만들어낸 폭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완전히 틀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앤드류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성공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스승이 진짜 좋은 스승인가?" 플레처의 방식이 없었다면 앤드류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까? 혹은 그는 다른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육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플레처의 방식이 만든 것은 위대한 연주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 명의 인간을 망가뜨린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교육과 성장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3. 승리인가 패배인가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한 긴장감과 감정의 폭발을 담고 있다. 무대 위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의 계략에 당해 망신당할 뻔하지만, 결국 그를 뛰어넘는 연주를 선보이며 전설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플레처는 예상치 못한 앤드류의 반격에 놀라지만, 결국 그의 연주를 인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들은 환호하고, 앤드류는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완벽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면을 단순한 승리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정말 플레처를 이기고, 자유를 쟁취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여전히 플레처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결말은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첫 번째 해석은 ‘승리의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앤드류가 플레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적 주체성을 확립했다는 관점이다. 반면, 두 번째 해석은 ‘또 다른 굴복’으로 보는 것이다. 앤드류가 플레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극단적인 길로 몰아넣었다는 관점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을 비교하며, 영화가 궁극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를 탐구해 보자. 앤드류는 영화 내내 플레처의 압박에 고통받으며 성장해 왔다. 그의 교육 방식은 가혹했고, 앤드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과 희생을 감수했다. 마지막 공연에서 그는 플레처의 의도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드럼 솔로를 연주하며 무대를 장악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초반에는 플레처가 무대의 지배자였지만, 앤드류는 그의 계획을 깨부수고 자신만의 연주를 시작한다. 이는 마치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전까지 앤드류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연주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흔들림 없이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다. 플레처는 처음에는 앤드류의 행동에 당황하지만, 이내 그의 연주에 집중하며 미소를 보인다. 이는 앤드류가 마침내 그의 기준을 넘어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앤드류가 플레처의 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뛰어넘는 존재로 성장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즉, 그는 스스로를 증명해 냈으며, 플레처의 기대조차 초월하는 연주를 보여줌으로써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다르게 해석하면, 앤드류는 여전히 플레처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마지막 공연에서 보여준 광적인 연주와 몰입은 플레처가 그토록 원했던 ‘광기 어린 헌신’의 실현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처가 원하는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혹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류는 트랜스 상태에 빠진 듯 연주하며,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다. 이는 예술적 몰입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집착을 의미할 수도 있다. 플레처가 마지막에 보이는 표정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다. 그는 앤드류가 마침내 자신의 이상에 도달한 것을 보며,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내가 원하던 천재가 드디어 탄생했다’는 듯한 모습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앤드류는 플레처를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방식에 완전히 길들여진 것이다. 즉, 그는 음악적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플레처의 세계에 빠져든 것이다. 한편으로 위플래쉬의 결말이 모호한 이유는, 단순히 승패의 구도로 해석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성공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최고의 드럼 연주를 선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관계와 정신적 안정을 모두 잃었다. 플레처를 이긴 것이 아니라, 그의 방식에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닐까? 그는 학생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좌절했다. 하지만 앤드류라는 ‘천재’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의 방법이 옳았던 것일까? 성공을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반드시 옳은 것일까? 창의성과 자유보다는, 고통과 희생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영화가 단순한 음악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희생, 성공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품임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을 단순한 승리 또는 패배로 나누는 것은 어렵다. 앤드류는 무대에서 플레처를 압도하며 환호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플레처가 원하던 ‘완벽한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플레처를 뛰어넘은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의 방식에 완전히 길들여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위플래쉬의 결말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승리와 패배가 공존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예술과 성공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결론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이 겪은 고통과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술적 성취가 반드시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예술적 성취한, 자신의 삶을 망치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에서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플래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대한 연주자를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교육법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고, 학생들의 정신적, 육체적 희생을 강요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위플래쉬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대한 결과를 얻기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류는 전설적인 연주를 선보이지만 그는 정말로 자유를 얻었을까? 아니면 그는 더욱 깊이 플래처의 세계에 빠져든 것일까?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며 그 질문은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