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 개봉일: 2023. 03. 15.
- 장르: 코미디, 드라마
- 평점: 8.30
- 등급: 15세 이상 관람
- 러닝타임: 114분
- 감독: 마틴 맥도나
- 주연: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1. 실존주의 관점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개봉 이후 현대인의 고독과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주목받았다. 특히 실존주의 철학 관점에서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고립, 자유의 책임, 무의미에 저항하려는 몸부림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일반적인 영화 리뷰나 줄거리 요약에서 벗어나, 실존주의 영화의 범주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를 분석하면 인간 본연의 존재 방식과 사회적 연결의 모순적 성격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의 무대는 아일랜드 서부의 가상의 섬 ‘이니셰린’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 섬은 시대적 상황과 함께, 외부와 단절된 물리적·심리적 공간으로 설정된다. 섬이라는 고립된 장소는 인간의 내면을 투사하는 무대이자, 실존주의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처럼, 이 섬에 사는 이들은 태어난 이유나 목적을 갖지 않고 단순히 ‘존재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지만, 그 일상은 점차 균열을 맞이하고, 그 틈에서 실존적 고민이 피어오른다. 주인공 파우릭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는 특별히 뛰어난 능력도 없고, 대단한 목표도 없지만 마을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친구인 콜름과 맥주를 나누는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콜름이 갑작스레 파우릭과의 관계를 끊으면서 파우릭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콜름은 그 이유를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파우릭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부조리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존에 익숙하던 질서가 무너지고, 존재가 이유 없이 부정당할 때 인간은 처음으로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콜름은 실존주의적 인간의 전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닌,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려는 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이며, 따라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책임이 있다. 콜름은 삶을 허무하게 소비하기보다는, 유의미한 창작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극단적이다. 파우릭이 계속해서 말을 걸자, 그는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협박을 하고, 결국 실제로 실현한다. 이는 단순한 예술가의 고뇌를 넘어서,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자유’와 ‘책임’ 사이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장면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가졌지만,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 역시 감내해야 함을 강조한다. 콜름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확보했지만, 그 선택은 주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고, 자신에게도 예술을 창작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가락이 없어진 음악가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알베르 카뮈가 말한 ‘시지프 신화’처럼, 의미를 찾기 위해 저항하지만 결국 무의미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반면 파우릭은 처음엔 단순하고 평범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변해간다. 그는 ‘착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콜름의 고통에 고통으로 응수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나귀가 죽자 그는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이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각성’의 한 순간이다. 의미 없던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다 실패한 인간이, 무의미 자체를 직시하며 새로운 태도로 삶을 대면하는 것이다. ㅍ이러한 변화는 파우릭이 더 이상 외부의 인정이나 관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착한 사람으로 남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한다. 실존주의에서 강조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이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파우릭은 그 진정성의 길로 들어선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밴시(Banshee)’는 아일랜드 전통 민속에서 죽음을 예고하는 요정이다. 영화에는 실제 밴시가 등장하지 않지만, 노파 한 명이 반복적으로 예언적인 말을 하며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밴시는 현실과 신화의 경계에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죽음에 대한 자각’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전제 조건이며, 인간은 죽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밴시의 존재는 이 작품이 단지 현실적 갈등을 넘어, 초월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운명과 존재의식을 환기시키는 영화임을 암시한다. 이는 실존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카뮈는 인간이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을 선택할 자유를 얻는다고 보았고,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를 통해 인간이 실존적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와 같은 철학적 사유를 영화적 이미지로 풀어낸 수작이다. 오늘날 우리는 SNS와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인간관계는 점점 피상적이고 단절되기 쉽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러한 현대인의 고독을 고립된 섬의 인물들을 통해 투영한다. 단절, 오해, 갈등, 상처는 현대인의 인간관계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이며, 영화는 이를 시대를 초월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또한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은 기술과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해진다. 콜름의 예술적 열망, 파우릭의 인간관계 지향성은 각각 현대인이 갖는 가치 추구 방식과 닮아 있다. 실존주의 영화로서 <이니셰린의 밴시>는 우리에게 단순히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인간관계의 파괴와 고립을 넘어, 실존 그 자체를 묻는 작품이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 영화는 자유, 책임, 죽음, 고독, 선택이라는 철학적 키워드를 통해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나 감상평을 넘어, 이 작품은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삶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진정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2. <이니셰린의 밴시>를 통해 본 창작의 고통
2022년 공개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단순히 두 남성의 우정이 파탄나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 작품은 창작이라는 고통스러운 행위가 인간의 일상과 관계, 심지어 정체성까지 어떻게 침식시키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음악가 ‘콜름’이라는 인물은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 욕망을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실존적 고통과 결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로, 창작의 본질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고통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예술은 도끼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했고, 헤밍웨이는 “진정한 글쓰기는 피를 토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진짜 창작’이란 단순한 낭만이나 영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임을 나타낸다. 영화 속 콜름 역시 이러한 ‘예술가의 고통’이라는 테마를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그의 선택과 행동은 단순히 고집스러운 예술인의 캐릭터가 아니라, 창작 행위가 수반하는 외로움과 단절, 그리고 자기 파괴를 그대로 드러내는 실존적 상징이다. 콜름은 중년의 음악가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절친한 친구 파우릭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그는 말없이 시간을 보내는 친구와의 대화를 ‘소모적’이라고 느낀다. 그 시간에 차라리 음악을 작곡하고, 후대에 남을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관계 갈등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다. 콜름에게 ‘예술’은 삶의 유일한 이유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방해 요소에 불과하다. 예술을 위해 인간관계를 끊는 그의 결단은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예술가의 내면을 고찰해 보면 결코 비현실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창작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과정이다. 특히 자기표현의 매체로서 예술을 택한 이들은 대개 내면의 혼란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콜름은 이 고독을 감수하면서까지 작품을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고립은 물리적 거리 두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파우릭이 말을 걸 때마다 위협을 가하고, 결국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다. 악기 연주를 위해 필요한 신체 부위를 스스로 파괴한다는 행위는, 창작의 고통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창작을 위해 그는 자신의 신체, 즉 예술의 도구조차 희생시킨다. 이러한 상징은 니체의 문장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니체는 “창조자는 고통받는 자다”라고 말한다. 콜름은 창작의 고통을 단순히 감내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선택한다. 그는 예술을 위해 자신을 파괴하며, 고통을 수단이 아니라 창작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란 결국 자기 희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매우 순수한 예술가라고도 볼 수 있다. 콜름이 창작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다. 창작과 인간관계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딜레마는 현실의 많은 예술가들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카프카는 약혼녀 펠리스와의 관계를 파탄내면서까지 글쓰기를 선택했다. 바흐는 20여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오직 음악에만 몰입했다. 콜름도 그와 다르지 않다. 파우릭과의 우정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연결이지만, 그 연결은 그에게 ‘방해’로 작용한다. 그는 결국 파우릭에게 “그냥 조용히 좀 해달라”고 말하며, 관계의 종료를 선언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창작자들이 겪는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 정보가 넘치고 인간관계가 확장된 시대,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내면의 창조 에너지가 분산되며, 깊은 사유나 몰입이 어려워진다. 콜름은 그런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단호하게 차단한다. 심지어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행위로까지 몰아간다. 그의 선택은 타협하지 않는 창작자, 자기 예술에 절대적인 무게를 두는 예술가의 고통을 상징한다. 하지만 역설적인 점은, 그가 손가락을 모두 잃음으로써 더 이상 음악을 연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창작을 위해 관계를 끊고, 손가락을 자른 끝에 그는 결국 창작의 수단마저 잃게 된다. 이 아이러니는 ‘창작을 위한 희생이 궁극적으로 창작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보여준다. 예술은 무엇을 희생해야 할 만큼 절실한가? 혹은, 예술을 지키려는 그 열망이 스스로를 소멸시키는가? 콜름의 선택은 또한 ‘창작은 고통이어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현대의 창작 담론에서는 ‘즐거운 창작’, ‘힐링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현도 많이 등장하지만, 콜름의 창작은 고통 그 자체다. 그는 친구, 평화, 육체의 안녕, 사회적 관계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택한다. 이는 예술의 본질이 고통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카뮈는 “예술은 무의미 속의 의미 창조다”라고 했다. 무의미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은 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콜름은 그 무의미에 맞서 싸운다. 그에게 예술은 자기표현을 넘어, 실존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증명은 결코 타인과 함께 이뤄질 수 없다. 그는 끝내 고립되고, 불구가 되며, 파우릭과의 감정마저 적대적 감정으로 남긴다. 창작은 자유의 산물이지만, 콜름의 자유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것이 예술가의 운명이라는 듯. <이니셰린의 밴시>를 연출한 마틴 맥도나는 원래 극작가 출신으로, 작품마다 예술과 인간 내면의 갈등을 집요하게 탐구해왔다. 이 영화 속 콜름은 단지 캐릭터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감독 자신’ 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즉, 콜름의 고통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의 일부가 아닌, 창작자 자신이 느끼는 내면의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콜름을 통해 말한다. 창작은 관계의 포기일 수도 있고, 자기 부정일 수도 있으며, 끝내 스스로를 상실하는 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그 길을 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예술을 향한 그 절실한 외침과 동시에, “창작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을 잃게 되는가”에 대한 가장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대답을 내놓는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예술이 단지 감정이나 낭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콜름이라는 인물은 창작을 선택하기 위해 인간관계를 끊고, 신체를 희생하며, 끝내 고독 속에 남는다. 그의 결단은 극단적이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내면에서 겪는 갈등과 일치한다. 창작은 자유의 영역이지만, 그 자유는 고통과 책임을 동반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통이 자신을 삼키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예술가의 내면을 가장 극명하고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창작에 대한 철학, 인간관계와 예술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 시간이다. 콜름의 결단은 곧,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묻게 한다.
3. 마틴 맥도나 감독의 연극적 영화 연출법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는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서사 작가이자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원래 연극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극작가로 출발했고, 이후 영화계로 진출해 자신만의 연극적 미학을 고스란히 스크린 위에 옮겨놓았다. 특히 그의 2022년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그러한 연극성과 영화적 언어의 조화를 통해 ‘극장의 감성’을 ‘영화적 형식’ 안에 담아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본 작품은 단순히 인물 간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라, 한 편의 무대극처럼 짜인 구성과 연출 속에서 인간 존재, 고독, 단절, 창작, 상징 등 복합적 철학을 전달한다. 이 글에서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연극적 영화 연출법이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살펴본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요 배경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아일랜드 섬 ‘이니셰린’이다. 이 섬은 외부와 단절된 지리적 고립성을 통해, 극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일 무대를 연상시킨다. 영화 내 대부분의 사건은 이 섬 안에서 발생하며, 관객은 좁은 사회적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충돌을 지켜본다. 연극에서는 무대 위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서사를 전개하듯, 맥도나는 이 섬을 심리적 갈등과 철학적 사유의 진원지로 삼는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서사와 감정 모두를 ‘외부 자극’이 아닌 ‘내부 응축’으로 이끌어낸다. 관객은 웅장한 배경이나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캐릭터의 표정, 침묵, 대사, 시선 변화 등에 집중하게 된다. 마치 무대의 객석에서 배우의 호흡과 땀까지 감지하듯, 영화는 공간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대신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중심에는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던 글리슨)의 인간관계가 있다. 두 인물은 기존까지 친구였으나, 콜름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서 극이 시작된다. 이 단순한 설정은 전형적인 ‘2인극’ 구조를 따르며, 연극의 핵심 장치인 대립-반응-변화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두 인물의 감정선은 빠르게 이동하지 않으며, 장면 속 대사와 침묵, 반복되는 일상이 겹겹이 쌓이면서 갈등이 점진적으로 고조된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대사’다. 대사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인물의 세계관, 정서, 충돌을 상징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니셰린의 밴시> 역시 대사 중심 서사를 따르며, 말보다 ‘말하지 않음’이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구조를 취한다. 콜름이 입을 닫았을 때 파우릭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듯 흔들리며, 그 침묵이 폭력으로 전이된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말하지 않음 자체가 존재론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된다. 맥도나 감독은 영화 편집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 장면이 전환되듯 각 시퀀스를 구성한다. 장면의 호흡은 길고, 인물의 움직임은 제한적이며, 많은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 머문다. 극 중 인물들이 자주 모이는 펍(술집), 집 앞의 길목, 절벽 등의 장소는 극장에서의 ‘세트’처럼 기능하며, 시각적으로 다채롭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응축된 무대가 된다. 특히 반복되는 대사와 상황은 연극의 리듬감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파우릭이 반복적으로 “왜 이러는지 말해줘”라고 묻고, 콜름이 반복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답하는 구조는 마치 장단이 반복되는 극적인 레퍼토리와도 같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의 변곡점을 예측하게 하면서도, 그 안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도록 훈련시킨다. 연극에서는 인물 한 명 한 명이 서사의 상징이자 주제를 대표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캐릭터 역시 그러하다. 파우릭은 전통적인 ‘착한 사람’으로서, 일상의 반복과 평화를 유지하려는 순수한 인물을 상징한다. 콜름은 예술과 창작의 고통,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실존주의적 인물이며, 시오반(파우릭의 여동생)은 탈출과 자기 주도성을 대변하는 현대적 여성이다. 그리고 섬의 노파는 거의 연극적인 장치로서, 죽음과 운명을 예고하는 밴시(Banshee) 전설의 메타포로 활용된다. 이처럼 각 인물은 실존적 철학, 사회적 역할, 상징적 의미를 분담하며 극의 구조를 떠받든다. 연극처럼 캐릭터의 심리보다는 ‘기호화된 존재’로 읽히는 이 구성은, 관객에게 감정보다는 해석과 사유를 유도하는 구조로 작용한다. 이는 맥도나가 인물 간의 갈등을 넘어서, 관객과 철학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마틴 맥도나의 연극적 영화 연출법은 단순히 ‘연극 같은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연극에서 유효했던 서사 기술과 표현 방식을 영화적 문법 안에 녹여, 무대와 스크린의 중간지대를 개척했다. 이는 관객에게 새로운 감상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극장에서처럼 긴 호흡으로 인물의 내면을 읽고, 스크린을 통해 시각적 감각까지 동시 체험할 수 있는 이중 감각은, 오늘날의 자극적 서사 중심 영화와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시청각적 자극보다 ‘정서의 여운’과 ‘의미의 탐색’을 강조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연극에서처럼 인물과 공간, 리듬과 언어에 대한 통제된 연출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바로 그런 연극적 영화 언어의 결정체이며, 동시대 영화 속에서 가장 밀도 있는 정적 서사이자 ‘움직이지 않아도 깊은 영화’의 예시라 할 수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마틴 맥도나 감독이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내러티브 미학을 확립해낸 작품이다. 그는 인물 간의 갈등, 공간의 상징성, 대사 중심 전개, 반복 구조, 캐릭터의 희곡적 구성 등 연극의 핵심 요소를 영화적 틀 안에 정교하게 이식하며, 새로운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가 단순히 시각적 장치의 집합체가 아닌, 깊은 성찰과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하나의 영화이자, 한 편의 무대극이며, 그리고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