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집필한 동명의 해양 생물학 서적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어부들과 교류하며 바다 생물을 연구했고,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의 기록 방식은 오늘날 해양 다큐멘터리에서 바다를 탐구하는 방식과 유사하면서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아보고, 조선 시대 지식의 소유 구조와 정약전의 학문적 태도를 살펴본 후, 현대 교육의 불평등 문제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집안 형제이면서 다른 길을 걸었던 정약전과 정약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약전과 현대의 바다 기록 방식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의 바다 기록 방식과 현대 해양 다큐멘터리의 기록 방식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비교해 보고, 시대와 기술이 달라도 여전히 인간이 바다를 탐구하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을 직접 채집하고 관찰하며 그 형태를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물고기의 비늘, 지느러미, 내장 구조 등을 세세히 분석하고 이를 묘사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생태 조사를 할 때 현장에서 직접 표본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정약전은 어부들에게 바다 생물의 이름과 특징을 물으며, 기존의 학문적 지식과 현장 경험을 연결하려 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인류학적 연구 방법과도 비슷한데, 오늘날 해양 다큐멘터리에서도 원주민 어부들이 바다 생태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정약전의 기록 방식은 문자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자산어보>는 바다 생물의 특징을 세밀하게 묘사했지만, 시각 자료(그림, 사진, 영상 등)는 부족했습니다. 이는 현대 다큐멘터리와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자산어보>는 글로 생물의 특징을 묘사했지만, 현대 다큐멘터리는 초고화질 카메라와 드론, 수중 로봇 등을 이용하여 실시간 영상을 기록합니다. 예를 들어 BBC <블루 플래닛>은 4K 카메라와 고속 촬영 기법을 사용하여 심해 생물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합니다. 이렇게 현대 다큐멘터리는 과거와 달리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바다를 시각적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바다 생태계를 기록하는 방식이 자산어보와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또한, 현대 다큐멘터리는 실험적 연구 결과를 CGI(컴퓨터 그래픽)로 시각화하여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가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가 바다에 미치는 영향을 그래픽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정약전의 기록 방식과 차별화된 점입니다. <자산어보>가 지역 어부들의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했다면, 현대 다큐멘터리는 전 세계 과학자들과 협업하여 해양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예를 들어, NASA와 공동 연구하여 해류의 흐름을 위성으로 분석하는 방식은 정약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술적 접근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전의 기록 방식과 현대 해양 다큐멘터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기록을 통해 바다 생태계를 보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남기려 했어며, 이는 오늘날 해양 다큐멘터리의 궁극적인 목표와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 다큐멘터리는 기후 변화, 해양 오염, 멸종 위기 생물 보호 등의 문제를 강조하며 바다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을 알립니다. 둘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점입니다. 정약전은 어부들과 교류하며 인간이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연구했고, 오늘날 다큐멘터리도 인간과 바다 생태계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예를 들면, 내셔널지오그래픽 <씨 오브 섀도우즈>는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이 생태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다룹니다. 셋째, 과학과 이야기의 결합입니다. <자산어보>는 단순한 학술서가 아니라, 정약전과 창대의 이야기를 통해 학문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현대 다큐멘터리도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며 감동을 전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2.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 <자산어보>는 조선 시대 유배지에서 학문을 연구했던 정약전과 어부 창대의 관계를 통해, 지식의 본질과 그것을 공유하는 행위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정약전은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지식이 양반 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시대에, 어부들과 지식을 나누며 바다 생물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신분을 뛰어넘은 학문 교류는 흔치 않은 일이었고, 이는 조선 시대의 신분 질서와 충돌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시대 지식의 소유 구조와 정약전의 학문적 태도를 살펴보고, 현대 교육의 불평등 문제와 비교하여 분석해 보겠습니다.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적 신분 사회였습니다. 학문과 교육은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앎’이 곧 권력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교육은 양반 자제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기본적인 한자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 시험을 통한 신분 상승도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양반들은 학문을 독점하고 백성들이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는 지식이 권력의 일부였기 때문에 학문을 공유하면 신분 질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실학 등 실용적인 학문은 성리학적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억압받았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약전이 신분을 뛰어넘어 어부들과 학문을 공유했다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는 지식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을 연구하면서, 기존의 양반 학문 방식이 아닌 어부들의 경험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자산어보>는 조선 최초의 해양 생물학 서적으로, 양반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지식을 반영한 학문적 업적이었습니다. 그는 “책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경험적 지식도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영화에서 정약전은 어부 창대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치고, 바다 생물에 대한 연구를 함께하며 학문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창대는 결국 양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선택합니다. 정약전이 창대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의미는, 단순히 개인의 지적 성장 차원이 아니라, 신분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식 구조를 만들고자 했던 도전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교육 기회를 결정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적 격차가 교육의 차이를 만듭니다.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 사이에는 학업 성취도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곧 조선 시대의 '양반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던 구조'와 유사한 교육 불평등 문제를 만듭니다. 현대에는 인터넷과 온라인 강의가 보편화되었지만, 경제적·환경적 이유로 이러한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계층이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조선 시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차이와 유사합니다. 결국 지식과 교육의 격차는 신분제를 폐지한 현대에서도 여전히 사회계층을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정약전이 신분을 넘어 지식을 공유하려 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교육의 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교육이 특정 계층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공유 자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약전의 학문적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집니다.
3. 정약전과 정약용의 지식적 태도 비교
영화 <자산어보>의 정약전은 신분과 계급의 틀을 뛰어넘어 학문의 본질을 탐구하고 지식을 나누려 한 실험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의 동생 정약용 또한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꼽히며, 방대한 연구와 저서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학문을 대하고,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정약전은 바다로 아나가 경험적 지식을 연구했으며, 정약용은 국가 개혁을 위해 학문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실천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약전과 정약용의 지식적 태도의 차이를 비교하고, 그들의 연구 방식이 어떻게 달랐으며 학문과 삶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정약전은 같은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두 형제는 모두 실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기존의 성리학적 경직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목했습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으로 유배를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만의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두 사람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과 생태계를 연구하며 이를 직접 기록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적 학문이 아닌, 실질적인 경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실증적 연구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또한, 어부 창대와 교류하며 바다 생물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배웠습니다. 학문을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보지 않고 백성들과 공유하며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학문을 지향했습니다. <자산어보>는 조선에서 최초로 바다 생물을 연구한 책이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지식이 담긴 학문적 성과이기도 합니다. 정약전을 자신의 연구가 정치적 목적을 띠지 않았으며, 단순히 국가 개혁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지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 500여 권이 넘는 저서를 집필하며 조선의 정치, 경제, 법률 개혁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에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해결하고 조선의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실제 행정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이었습니다. 정약용은 기존의 학문적 자료와 경전을 분석하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서양과 중국의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며,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개혁안을 마련했습니다. 국가 개혁을 위해 실학을 발전시켰지만, 학문을 주로 양반 지식인들에게 공유하는 형태였습니다.
결론
영화 <자산어보>에서는 정약전이 바다 생물을 연구하여 글로 기록을 남깁니다.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바다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약전이 글로 바다를 남겼듯, 오늘날에는 영상으로 바다를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하는 방식은 달라도 인간이 바다를 탐구하는 이유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약전과 정약용이 걸어간 길은, 지금 우리가 학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약전의 도전이 남긴 메시지는 지식은 특정한 계층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 평등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