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 개봉일: 2024. 11. 06.
- 장르: 드라마, 멜
- 평점: 8.27
- 등급: 전체 관람가
- 러닝타임: 109분
- 감독: 조선호
- 주연: 홍경, 노윤서, 김민주
1. 제목의 의미 - 소리와 말 그리고 숨겨진 진
조선호 감독의 2024년 영화 <청설>은 제목부터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 두 글자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 인물의 관계, 그리고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정서적 세계관을 응축하고 있다.
‘청설(聽說)’은 중국어나 한자어 기반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직역하면 “들은 이야기”, “풍문” 또는 “소문에 의하면”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한 글자씩 쪼개면 그 안에 더욱 깊은 철학이 숨어 있다. ‘聽(들을 청)’과 ‘說(말씀 설)’, 말 그대로 ‘듣고 말함’이라는, 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두 행위.
하지만 영화는 이 듣고 말하는 구조를 일부러 무너뜨린다. <청설>은 ‘말하지 않는 이야기’, ‘들을 수 없거나 들리지 않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대사보다 숨결, 말보다 눈빛, 설명보다 여운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제목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이며, 동시에 깊은 은유다. <청설> 속 인물들은 겉보기에 무척 조용하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감정을 분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무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된 감정을 눌러놓은 채로 흘러가는 긴장감 있는 침묵이다. ‘설(說)’의 세계, 즉 말하고 전달하는 것의 세계가 감정 과잉과 소음으로 넘쳐나는 시대에서, <청설>은 ‘청(聽)’의 세계, 즉 듣는 태도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무언의 언어로 가득하다. 몸짓, 공간의 사용, 시선의 교차, 빛의 명암까지 모두가 말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의 감각을 일방적으로 자극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방식이다. 감독은 설명하지 않고, 인물은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설>이라는 제목이 지닌 아이러니한 힘이다. <청설>은 청각장애라는 설정을 단순히 캐릭터의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 영화가 채택한 서사적 시선의 중심이다. 청각이 결핍된 인물이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고 전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청(聽)’의 철학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성 인식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 분위기, 표정, 속도까지 듣는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듣는 행위’를 오직 귀를 통해 이루어지는 기능적 작업으로만 여기게 됐다. 하지만 <청설>은 듣는다는 것이 마음의 준비 상태, 감정의 수용 태도라는 점을 천천히 보여준다. 결국 ‘청’은 물리적 기능이 아니라 관계적 자세이며, 사랑과 배려, 공감의 시작점이다. ‘설(말씀 설)’ 역시 단순한 전달 행위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말’은 대부분 생략되며, 말보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말하면 깨질 것 같은 감정들이다. 현대 사회는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석하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말해야 하고, 화가 나면 표현해야 하고, 슬프면 토로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청설>은 이 당연한 전제를 거부한다. 오히려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관계, 설명하지 않아서 더 깊이 남는 감정을 보여준다. 말이 적을수록 관계는 조심스러워지고, 그 조심스러움 안에 정성과 집중이 깃든다. 이런 방식은 겉으로는 느리게 보이지만, 사실은 더 오래가고, 더 진실되다. 2024년 현재,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고, 수많은 뉴스와 이야기, 소문과 사실이 뒤섞인 말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만큼 말의 무게는 가벼워졌고, 듣는 일은 선택이 아닌 생략이 되었다. 이 시대에 <청설>이라는 영화가 가진 힘은 그 모든 과잉에서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고요함이다. ‘청설’은 단순히 조용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는 영화이며, 듣는 사람을 위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보다, 먼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청설’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언어적 중의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소통의 재정의’이자, 현대 관계의 위기 속에서 다시 꺼내든 원초적 질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소통이란 무엇인가? 말은 왜 때때로 진심을 왜곡하는가?
<청설>은 소통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결핍과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껏 말하는 데에만 익숙했던 우리에게, 이 영화는 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속삭인다. 듣는 사람의 태도,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정, 설명 없는 진심. 이 모든 것이 바로 <청설>이라는 두 글자가 가진, 그리고 이 영화가 내내 우리에게 들려주려 했던 ‘말’ 일 것이다.
2. <청설> 속 드러나지 않는 감정
2024년 조선호 감독의 영화 <청설>은 조용한 영화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무심함이 아니며, 결핍도 아니다. 오히려 그 조용함은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청설>은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하고 있는 멜로 영화의 감정 구조와는 분명히 다른 결을 갖는다. 소리를 줄이고, 말은 삼키며, 표정은 감추고, 감정은 미루는 방식. 그러나 바로 그 조심스러움 안에서 <청설>은 강한 진심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진심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대부분의 멜로 영화가 감정을 ‘강하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면, <청설>은 감정을 ‘숨기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그 숨김은 위장이 아니라 보호다. 이 영화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방식으로 감정의 밀도를 키운다. 관객은 대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시선, 손짓, 공기 속에서 흐르는 정서로 마음을 건드린다. 이렇듯 <청설>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멜로의 본질을 다시 꺼내 보이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춘 멜로는 감정을 빠르게 보여주고, 대사로 요약하며, 갈등을 명확하게 구획 짓는다. 사랑은 고백으로 시작되고, 이별은 울음으로 매듭지어지며, 관객은 그 안에서 예상 가능한 감정 선을 따라간다. 그러나 <청설>은 이 공식을 철저히 해체한다. 이 영화에는 ‘크게’ 말하는 장면이 없다. 고백은 없다시피 하며, 충돌은 잘게 부서지고, 갈등은 내면에 숨겨진 채 흘러간다.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은 침묵이다. 감정의 기복을 표현하기보다 그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감정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흐르게 한다는 철학. 이 영화는 그것을 고요하게 밀어붙인다. 이런 감정 운용 방식은 오히려 관객을 더 적극적으로 만든다. 무언가를 설명해 주는 영화가 아니라, 감정을 스스로 추적하게 만드는 영화. 그 속에서 우리는 느끼고, 해석하고, 참여하게 된다.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은 더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용한 멜로’의 설득력이다. <청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않는다. 첫눈에 반하거나, 우연이 반복되는 식의 판타지를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데 시간을 쓰고, 말 대신 관찰로 감정을 쌓아간다. 이 과정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하게 될 때 겪는 시간처럼, 불확실하고 천천히 흐른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인물 간 거리감이 가까워질수록 말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말 대신 시선이 있고, 대사 대신 멈춤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낯가림이나 어색함이 아니다. ‘조심스러운 감정’의 온도이며, ‘관계의 깊이’가 아직 허락되지 않았음을 인물들이 서로 존중하는 태도다. 이 영화가 제안하는 새로운 멜로 공식은 여기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오히려 말을 아낀다. 말하지 않는 게 더 진심인 순간들이 있다. <청설>은 그 감정의 순간을 영화로 옮겨놓는다. 조선호 감독은 <청설>을 통해 말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사가 아니라 ‘감정의 결’이다. 결이란 감정이 스쳐가는 방향, 깊이, 속도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결코 숫자로 환산되거나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인물의 작은 손짓이나 숨길 수 없는 눈빛에서 그들의 감정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이 장면은 슬프다'라고 말하지 않고, 슬픔이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 오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바로 그것이 <청설>의 미학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도 이렇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보다,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는 순간이 더 많다. 그 감정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정리되지 않으며, 그래서 더 강하다. <청설>은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 <청설>은 흔히 말하는 ‘청춘영화’의 틀에서도 멀어져 있다. 이 영화는 청춘의 불꽃보다, 청춘의 그림자를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삶은 격렬하지 않고, 사건은 크지 않으며, 갈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고, 상처받고, 성장하지만 그 모든 일은 굉장히 조용히 일어난다. 그 조용함은 감정이 얕아서가 아니라, 감정이 클수록 말을 아끼게 된다는 진실을 반영한다. 많은 청춘 영화가 성장의 과정을 통증으로 풀어내는 데 비해, <청설>은 그 통증을 스스로 삼키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삼킨 감정이 영화의 리듬이 된다. 결국 청춘은, 소리 내지 않아도 깊이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의 영역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청설>이 제안하는 새로운 멜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시작된다. 관계는 빠르게 진전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흐른다. 감정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겨놓는 것이다. 고백은 말보다 행동으로 이뤄진다. 감정의 밀도는 서사의 속도가 아니라 여백의 깊이에서 나온다. 이런 공식은 매우 고전적이지만, 동시에 지금 시대에 더 절실하다. 말이 넘치는 시대, 감정은 자주 과잉되고, 관계는 쉽게 소비된다. 그런 시대에 <청설>이 제안하는 ‘덜 말하고, 더 느끼는’ 멜로 방식은 오히려 더 신선하고 설득력 있다. <청설>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우리는 그 조용한 층을 하나씩 걷어내며, 결국 당신은 말하지 않은 감정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3. 보는 청각 영화
2024년 조선호 감독의 영화 <청설>은 ‘청각’을 둘러싼 영화적 접근 방식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단순히 청각장애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시선과 감각의 구조 자체를 청각의 결핍 위에 설계했다는 점에서, <청설>은 지금껏 멜로 영화가 취해온 감정 전달 방식에 대한 대담한 전복이자 성찰의 결과물로 읽힌다.
‘보는 청각 영화’라는 이 독특한 개념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조선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감정은 반드시 말로, 소리로, 음악으로만 표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아니오”라고 조용히 대답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침묵의 리듬, 고요한 장면, 시선의 여운, 호흡의 간격 속에서 천천히 흘러나온다. <청설>은 말하자면, ‘말하지 않는 것들’로 말하는 영화, ‘들을 수 없도록 설계된 사랑’의 시뮬레이션이다.
<청설>은 청각장애가 있는 인물을 중심에 두지만, 그 장애를 극복의 서사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호 감독은 청각이 결핍된 인물의 세계 인식 방식을 영화의 구조적 감각으로 끌어온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의 특징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에게 그 감각적 조건을 이식하는 서사적 장치로 작용한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순간’을 단절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청설>에서는 그 무음의 순간들이 오히려 감정을 가장 깊이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는 영화적 청각의 기능이 정보 전달이나 정서적 고조가 아니라, 감정을 유예하고, 상상하게 하고, 체화하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음은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진심이 통과하는 통로다. 조선호 감독은 이 무음의 층을 감정적으로 설계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듣지 않는 감정’을 통해 오히려 감정을 더 깊이 ‘보게’ 된다. 전통적인 멜로 영화는 감정의 진폭이 클수록 좋은 영화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고백 장면은 격정적이어야 하고, 갈등은 폭발해야 하며, 이별은 오열로 완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청설>은 이 공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말로 이뤄지지 않으며, 고백은 무언으로, 갈등은 단절보다 흐림으로 표현된다. 조선호 감독은 감정을 숨기는 연출이야말로 진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역설을 영화 전체에 관통시킨다. 사랑은 말보다 시선에 담겨 있고, 위로는 대사보다 타이밍과 거리에 있다. 특정 장면에서는 인물 간에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지만, 관객은 그 조용한 정적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연출의 취향이나 형식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호 감독이 믿는 ‘관계의 방식’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관계는 강요하지 않아야 하고, 감정은 해석 가능성을 남겨두어야 하며, 사랑은 종종 설명보다는 ‘존재의 밀도’로 증명된다는 믿음. <청설>의 또 다른 인상적인 점은 시선의 설계다. 청각 대신 시각이 강화된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눈빛, 바라봄, 피함, 머뭇거림 같은 작은 움직임이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언어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적 특성과 절묘하게 맞닿는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는 예술’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방식’은 언제나 익숙한 내러티브에 가려져 있었다. 감정의 고조를 위한 클로즈업, 음악의 상승을 위한 트래킹, 극적인 긴장감을 위한 카운터 샷. 그러나 <청설>은 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그는 시선을 고정하고, 인물을 멈추게 하며, 장면을 길게 지켜본다. 이는 마치 관객이 하나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며, 그 안에 서서히 빠져들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 결과, 관객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층’을 따라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굉장히 내밀한 영화 경험이며, 오늘날처럼 빠르고 설명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에는 오히려 더 귀하고 낯선 감각이다. <청설>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지 감각을 비튼다는 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는 관객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는 일반적인 영화에서 ‘정보를 파악하고 감정을 따라가는’ 존재였다면, <청설>에서는 ‘정보를 스스로 감지하고 감정을 함께 견디는’ 존재로 이동하게 된다. 영화가 말을 하지 않을수록, 관객은 더 많이 ‘들으려고’ 한다. 음악이 줄어들수록, 관객은 이미지의 흐름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이 이야기의 일방적 청자가 아닌 정서적 동행자가 된다. 이처럼 조선호 감독은 영화적 감정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공감하고 감당하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단지 연출력이 뛰어나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가 관객을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청설>은 멜로 영화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한 ‘멜로’와는 확실히 다른 결을 지녔다. 이 영화에는 전형적인 고백도 없고, 극적인 결말도 없으며, 누구 하나 분명히 상처받거나 구원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청설>은 멜로라는 장르의 경계를 해체하며, 감정의 발생과 흐름 자체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조선호 감독이 감정을 드러내는 데 급급하지 않고, 감정이 스며드는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청설>은 감정을 ‘이야기’로 설명하지 않고 ‘시간’으로 체화시킨다. 영화를 본 관객은 극장에서 나오고 나서야,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서히 알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청설>은 멜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한다.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 소리를 빼내는 방식으로 감정을 더 선명히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하나의 관계가 ‘되었다’는 확신이 아닌, ‘흘렀다’는 여운만으로도 사랑은 충분하다는 것. 조선호 감독의 <청설>은 결과적으로 감정을 말하지 않고 전달하는 법,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믿게 만드는 법, 그리고 사랑을 완성하지 않고도 오래 남게 하는 법을 보여준다.
‘보는 청각 영화’라는 이 실험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감정과 관계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되묻는 일이다.
지금은 오히려, 말보다 침묵이, 음악보다 정적이, 고백보다 기다림이, 더 진심일 수 있다는 것을 <청설>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