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 2019. 04. 11.
- 장르: 드라마
- 평점: 8.13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13분
- 감독: 폴 슈레이더
- 주연: 에단 호크, 아마다 사이프리드
1. 인간 존재의 불안, 종교가 줄 수 있는 답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선택지를 마주하게 되었고, 그만큼 더 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기술은 발전했고, 문명은 진보했지만, 오히려 인간은 존재론적 고독 속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영화 <퍼스트 리폼드>는 정적인 화면과 느린 호흡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을 섬세하게 들춰낸다. 이 영화는 액션이나 자극적인 전개 없이도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에단 호크가 연기한 ‘톨러 목사’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상실을 겪은 종교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느끼는 불안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톨러 목사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함께,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신앙 속에서 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가 일기장에 적는 문장들은 단지 종교적인 고민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된다. “기도는 공허하고, 신은 침묵한다.” 이 문장은 단지 그의 신앙적 회의가 아닌, 모든 신념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을 보여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종교를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침묵과 무기력함 때문이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가? 톨러 목사의 고민은 곧 관객의 고민이 된다. 영화는 종교를 맹목적인 믿음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가 인간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과거에는 종교가 삶의 중심에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 성당, 절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고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점점 형식화되고 제도화되어, 인간 존재의 불안을 치유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듯하다. <퍼스트 리폼드> 속 대형 교회는 자본과 결탁하고 환경 문제에 무관심하다. 반면 역사적인 작은 교회는 점점 쇠락해 가고, 목사는 혼자 그 자리를 지킨다. 이 대비는 종교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오늘날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톨러 목사는 기후위기 문제로 상담을 요청한 환경운동가와의 대화를 통해 또 다른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고백은 단순히 개인의 절망이 아닌, 인류 전체의 위기감을 반영한다. 그 환경운동가는 “아이를 낳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구는 멸망하고 있고, 미래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그에게 신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이 장면은 현대 사회가 얼마나 거대한 무력감에 빠져 있는지를 드러낸다. 종교는 이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톨러 목사는 그의 죽음 이후, 점점 더 무너진다. 그는 이제 기존의 신앙으로는 이 세상의 고통과 절망을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때로는 더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종교가 현실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기력하게 반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닌 ‘불안의 방치’가 된다. <퍼스트 리폼드>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종교가 세상과 단절되어 자기만의 신념만을 외친다면, 그것은 삶의 해답이 되지 못한다.
톨러 목사의 내면적 변화는 종교가 인간 내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처음에는 목사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신념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신에 대한 믿음도, 교회의 가치도 점점 흔들린다. 그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만, 그 끝은 점점 파괴적인 성향으로 기울어간다. 환경문제에 대한 분노,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절망은 그를 극단으로 내몬다. 이것은 단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할 때, 인간은 더욱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감독 폴 슈레이더는 <퍼스트 리폼드>를 통해 단지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종교가 ‘실존의 도구’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톨러는 폭력적인 결정을 준비하며 스스로를 정화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어떤 면에서 신의 뜻보다 인간의 분노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이끄는 마지막 행위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실존적 절규에 가깝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가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해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퍼스트 리폼드는 무척 조용한 영화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깊고 묵직하다. 이 영화는 분명히 인간의 존재적 불안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종교가 그것에 답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하지만 영화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종교적이다. 답을 강요하지 않고, 질문 속에 머물도록 만드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현대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일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수많은 불안과 마주한다. 그 불안은 때로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때로는 아주 구체적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 죽음의 두려움, 사랑의 상실, 환경 파괴, 사회적 고립 같은 것들이 모두 우리의 가슴속에서 커다란 무게로 남는다. 그리고 그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하지만 <퍼스트 리폼드>는 말한다. 단지 교회에 나간다고, 기도를 한다고,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종교는 그 불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가질 때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종교 영화가 아니다. 철학 영화이고, 심리 드라마이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작품이다. 종교가 단순히 정답을 주는 존재가 아닌, 질문을 더 깊게 파고들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톨러 목사의 일기장처럼, 우리 각자도 자신의 내면을 기록하며 질문을 품어야 한다. 신이 침묵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퍼스트 리폼드>는 그런 고민을 우리 앞에 던지고, 조용히 퇴장한다. 그 여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머문다.
2. 고백이라는 장치
고백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언어다. 평소에는 결코 꺼내지 못할 감정과 진실이 입을 통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는 고백이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마주한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이 고백이라는 장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왔다. 특히 내면의 갈등이 중심을 이루는 드라마나 심리극에서 고백은 이야기를 밀도 있게 만들고, 캐릭터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핵심 장치로 자주 등장한다. 폴 슈레이더 감독의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이 고백이라는 장치를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퍼스트 리폼드>의 주인공 ‘톨러 목사’는 날마다 일기를 쓴다. 이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고백의 형식이다. 그는 하루하루 자신이 겪는 감정과 생각을 담담히 써 내려간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목사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회의와 슬픔, 분노가 교차하고 있다. 그는 아들을 잃었고, 그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의 고백은 누구에게 하는 것도, 신에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고백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고백이 지닌 방식과 조금 다르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고백’이라는 장치를 기존의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철학적, 심리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톨러 목사의 고백은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한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신에게 실망하고, 종교 시스템에 분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고백은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을 직면하는 행위로써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고백은 타인 또는 신에게 죄를 드러내고 용서를 구하는 의례적 행위다. 하지만 <퍼스트 리폼드>에서의 고백은 절차나 형식에 기대지 않는다. 감독은 이 고백을 통해 인간이 신 앞에서조차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톨러는 자신이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결국 혼잣말 같은 일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영화의 대사나 장면보다도 더 강력하게 톨러의 고백이 전달되는 방식은 카메라의 정적인 시선과 침묵이다. 그의 고백은 말보다 시선, 행동보다 정적인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는 감독 폴 슈레이더가 <성스러운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영화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적 고독과 영화적 고백 사이에 교차점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영화 속 고백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침묵과 정적 속에서 느껴진다. 톨러가 교회 의자에 홀로 앉아 고개를 숙이는 장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기를 쓰는 장면, 물을 마시며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고백의 다른 형태다.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톨러의 고백은 점점 파괴적인 형태로 바뀌어간다. 처음엔 그저 기록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던 사람이, 이제는 세상을 향한 분노로 무너져간다. 그 고백은 더 이상 내면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외부로 향한 절규로 변해간다. 이는 곧 신에게 외면당한 인간의 마지막 수단이기도 하다. 신이 대답하지 않고, 사회는 침묵하며, 주변 사람들도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를 고립시킨다. 그 고립 속에서 마지막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고백뿐이다. 그러나 그 고백마저도 이제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히려 고백은 점점 절망의 증거로 축적된다. <퍼스트 리폼드>는 종교 영화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현대인의 고립과 정신적 붕괴를 그린 실존주의 영화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고백은 단지 종교적 장치가 아닌, 실존적 감정의 최후 수단으로 사용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낼 공간도, 들어줄 사람도 없을 때, 고백은 일기장이 되고 술병이 되고, 때로는 파괴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철저히 따라간다. 그리고 톨러 목사의 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고백하고 있는가?" 고백은 언제나 인간적인 행위다. 아무리 신 앞에서의 고백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기 위한 행동이다. <퍼스트 리폼드>에서 고백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제도적 절차가 아닌, 인간의 외로움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절박한 소통이다. 그 고백이 응답을 받을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침묵 속에서도 여전히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깊은 울림을 준다. 고백은 때로 말이 되지 않더라도, 글이 되지 않더라도,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톨러의 고백은 일종의 영적 저항이다. 시스템화된 종교에 대한 저항이며, 무감각한 세상에 대한 저항이고, 무엇보다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선택이다. 그것은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이자, 존재의 부서진 조각을 붙들기 위한 마지막 행위다. <퍼스트 리폼드>는 그 고백이 비록 구원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고백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 자신의 내면이다.
3. <퍼스트 리폼드>와 기후 우울증의 접점
영화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개인적 신앙을 다루는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문제들이 교차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기후 우울증’이라는 현대적인 감정과의 강한 접점이다. 기후 우울증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심리적 현상이다. 환경 파괴, 기후 위기, 인간 문명의 파국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무기력감, 죄책감, 절망감이 그것이다. 폴 슈레이더 감독은 이와 같은 감정을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퍼스트 리폼드>의 주인공 톨러 목사는 단지 종교적 회의에 빠진 인물이 아니다. 그는 어느 날 찾아온 환경운동가 마이클과의 상담을 통해 기후 위기의 현실과 맞닥뜨린다. 마이클은 아내가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라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는 기후변화가 불러올 미래가 파국적일 것이라고 믿으며, 희망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명확하게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다. 종교적 신념의 흔들림이라는 개인적 고민이, 이제 인류 전체의 생존 문제로 확대되는 순간이다. 마이클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현실적인 통계와 과학적 예측에 기반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세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더 이상 아무것도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절망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느끼는 기후 우울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이상기후, 거대한 산불과 홍수, 멸종하는 종들, 북극 빙하의 붕괴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바로 이 ‘무력감’이 기후 우울증을 더욱 깊게 만든다. 톨러 목사는 마이클의 이야기를 단순한 상담자의 시선이 아니라, 동료 인간으로서 듣는다. 그는 점차 그 생각에 감염되고, 그 불안과 절망을 공유하게 된다. 일기장에는 기후위기에 대한 단상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고, 그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대형 종교 조직이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시작한다. 종교는 본래 인간의 고통과 공포를 다루는 역할을 해왔지만, 현대의 종교는 이미 자본과 결탁해 사회적 문제에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좌절하게 만든다. 여기서 영화는 기후 위기와 종교적 회의,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복합적인 테마를 하나로 엮는다. <퍼스트 리폼드>가 탁월한 점은 이러한 복잡한 감정 상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인물의 시선과 심리적 변화로 천천히 끌고 간다는 데 있다. 기후 우울증은 사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태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괴리 속에서 살아가는 감정이다. 영화는 이 괴리감을 탁월하게 재현한다. 교회는 여전히 조용히 미사를 진행하고, 사람들은 무심하게 살아가지만, 톨러 목사의 내면은 폭풍처럼 흔들린다. 그 내면의 갈등은 결국 신체적 자기 파괴, 윤리적 혼란, 극단적인 구원 시도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기후 우울증을 다룬 다른 콘텐츠들이 희망적 메시지나 행동을 촉구하는 데 집중하는 것과 달리, <퍼스트 리폼드>는 불편할 정도로 냉정하다. 영화는 말한다. 어떤 믿음도, 어떤 체계도 이 파국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이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혼란을 안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기후 우울증을 진지하게 다룬 결과이기도 하다. 쉬운 위로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함께 그 불안 속에 머무르자는 감독의 태도는 오히려 오늘날 관객들에게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이 영화는 ‘행동’에 대한 고민도 함께 제시한다. 마이클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톨러는 그가 남긴 유품과 글들을 읽으며 점점 행동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위해, 그리고 인간의 무관심과 방관을 끝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계획한 행동은 구원이나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비롯된 파괴다. 기후 우울증이 극단적인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 심리적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는 종교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점점 외톨이 활동가, 혹은 파괴자에 가까운 인물로 변화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파괴를 옹호하거나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극단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과 개인의 절박함을 조명한다. 기후 위기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회와 조직, 그 안에서 고립된 개인의 심리적 상태는 이 시대가 직면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퍼스트 리폼드>는 그 질문을 무겁고도 진지하게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는 그 불편한 질문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여지를 남긴다.
기후 우울증은 더 이상 일부 활동가나 연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후 변화로 인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는 그 정서를 가장 진실하게, 그리고 조용히 담아낸 작품 중 하나다. 이 영화는 누군가의 고백이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과 같다. 종교가 답하지 못한 질문, 사회가 외면하는 진실 앞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외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외로움이 우리 모두의 것임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