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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임> 움직임의 해방, 창의성, 지하철 안에서의 춤

by borybory-click 2025. 5. 11.

영화 &lt;페임&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09.09.24.
  • 장르: 뮤지컬, 드라마
  • 평점: 7.03
  •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22분
  • 감독: 케빈 탄차로엔
  • 주연: 애셔 북, 케이 파나베이커, 케링턴 페인, 폴 맥길, 월터 페레즈, 나투리 노튼  

 

1. <페임> 속 무용 장면의 움직임의 해방

영화 <페임(Fame)>은 단순한 뮤지컬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예술가로 성장해 가는 청소년들의 치열한 내면을 그리며, 춤과 음악, 연기를 통해 그들의 감정과 사회적 위치, 꿈과 좌절을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특히 영화에서 무용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언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억압을 신체를 통해 말하게 하고, 그 움직임은 곧 해방의 순간으로 기능한다. <페임> 속 무용 장면은 예술의 형식이자, 인간의 감정이 몸을 통해 말하는 장치이며, 그 자체로 해방의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무용 장면은 대부분 특정한 서사를 설명하기보다, 등장인물의 심리적 변화와 감정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춤은 말보다 앞서며, 설명보다 먼저 이해되며, 대사가 가닿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한다. 특히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무용을 단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상의 곳곳—복도, 계단, 거리, 심지어 식당까지—를 무대 삼아 자유롭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무용이 곧 생활이며,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본래 통제와 규율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페임> 속 학생들은 그 틀을 춤으로 부순다. 교실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중에도 음악이 흐르면 누군가 즉흥적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하고, 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듯 퍼져간다. 이런 장면은 감정의 폭발이라는 예술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억눌림과 규율 속에서 감정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단순한 연습이 아닌 ‘해방’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지하철 장면은 이 영화의 상징적인 무용 장면 중 하나다. 통제된 공간, 반복되는 일상, 목적지로 향하는 기계적 흐름 속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춤은, 도시적 억압과 젊은 열정이 충돌하는 지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댄서가 아닌 ‘삶을 추는 사람들’이 된다. 이 춤은 안무된 기교가 아닌, 리듬에 반응하는 즉흥적인 감정의 언어다. 억압된 공간에서 느껴지는 그 해방감은 단순한 장면 연출을 넘어선 영화적 상징으로 읽힌다. <페임> 속 무용은 경쟁과 해방,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는다. 입학 오디션, 시험, 공연 리허설 등에서는 경쟁을 위한 무용이 펼쳐진다. 여기서 춤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된다. 다듬어진 테크닉, 정확한 동작, 타이밍은 모두 평가 대상이다. 반면, 수업이 끝난 뒤 연습실에 혼자 남아 혼신의 힘을 다해 추는 독무 장면에서는 해방의 춤이 나온다. 이때의 움직임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흐트러지고, 비틀거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감정과 자기 해석이 담겨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페임>은 춤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춤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주는 영화다. 무용수의 몸은 극 중에서 언제나 ‘언어보다 앞선 존재’다. 예를 들어, 갈등이 극에 달한 후 말싸움 없이 곧바로 춤 장면으로 전환되는 경우, 감정은 움직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이는 무용이 대사보다 더 솔직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감정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영화는 이를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신체의 흐름을 따라가며 관객이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빠른 컷 편집 대신 긴 테이크와 부드러운 팬 카메라는 인물의 숨소리, 땀, 근육의 긴장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감정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페임>이 단순한 뮤지컬 영화가 아닌, 예술교육 영화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용 장면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다. 많은 영화들이 춤을 장식적인 요소로 활용하거나, 클라이맥스를 위한 감정의 폭발 장치로만 사용한다. 그러나 <페임>은 춤 자체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바라본다. 무용은 등장인물의 하루를 구성하고,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매개가 되며, 자아를 형성하는 근원이 된다. 영화는 춤을 통해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 단순히 기술의 연마가 아니라, 삶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춤은 자유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벼운 날갯짓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쟁취된 결과다. <페임> 속 학생들은 종종 쓰러지고, 실망하고, 평가받고, 좌절하지만 다시 일어선다. 그 반복 속에서 신체는 점점 더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고, 춤은 그 감정을 발산하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춤은 단순히 공연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 된다. 내 감정이 진짜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행위, 그게 바로 <페임> 속 무용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다. 또한 이 영화는 무용을 ‘소수자 정체성’의 해방과도 연결시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 많은 이들이 가난하거나, 이민자 가정 출신이거나, 혹은 성적 정체성을 감추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춤을 출 때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을 보면, 무용은 단지 신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억눌린 정체성을 해방시키는 강력한 매체임을 실감하게 된다. 춤은 말보다 안전하고, 때로는 더 진실하다. 무용은 이들에게 도피처이자, 동시에 투쟁의 도구다. 이렇듯 <페임> 속 무용 장면은 예술과 감정, 해방과 억압, 경쟁과 자아 발견이라는 여러 층위를 동시에 포괄한다. 관객은 이 춤을 통해 단지 ‘잘 추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본다. 뛰어난 춤 실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춤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이다. <페임>은 그것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결국 이 영화가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재능 있는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신체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나는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과정을 묵직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용이라는 움직임의 언어가 있다. <페임> 속 춤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은 단지 예술이 아니라, 해방이고 진실이고, 삶이다.

 

2. 불안과 압박 속 창의성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창의성은 언제 가장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가. 평화롭고 안정된 상황보다,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린 순간, 혹은 누군가의 기대와 시선에 짓눌릴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가장 창의적인 본능을 발휘하곤 한다. 영화 <페임(Fame)>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마주하는 불안과 압박은 단순히 청춘의 고민 수준이 아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타인과 비교되는 순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감정들 속에서 창의성은 터져 나온다.

<페임>은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학생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 존재하는 ‘불안의 흔적’을 놓치지 않는다. 처음 입학 오디션을 볼 때부터, 학생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압박 속에 놓여 있다. 이들은 단지 예술을 사랑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는 가족의 기대를 짊어진 채 이곳에 섰다. 이런 압박은 때로는 마비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마비 직전에 창의성은 아주 예민하게 깨어난다. 그리고 영화는 이 흐름을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포착한다. 무대 공포증을 앓는 학생이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 앞에 서면 손발이 떨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연습실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노래하고 춤춘다.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해방감, 그리고 억눌린 감정이 섞여 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모여 만들어낸 퍼포먼스는 기계적으로 연습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동을 준다. 이처럼 <페임>은 불안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깊은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가의 삶은 늘 긴장 위에 있다. 완벽함을 요구하는 구조 속에서 매일같이 평가받고,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그러나 그 긴장 상태야말로 창의성의 불씨가 되는 경우가 많다. <페임> 속 학생들은 매일 새로운 과제를 받고, 그 안에서 자기 색깔을 찾아야 한다. 실패하거나 주목받지 못하면 밀려난다는 위기의식이 그들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그 결과,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나 음악이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순간마다 관객은 진짜 예술의 탄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안락함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불안과 창의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마감 기한이 코앞일 때,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주변에서 기대와 무관심이 교차할 때, 그들은 오히려 가장 강렬한 표현을 만들어낸다. <페임>은 그런 현실을 미화하지 않되, 그 속에 숨어 있는 예술적 본능을 진심으로 조명한다. 특히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들, 예를 들어 오디션에서 탈락한 뒤 눈물을 쏟고, 혼자 남아 다시 무대를 준비하는 장면 등은 창의성의 이면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영감보다도 진실한 감정에서 비롯된 에너지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특히 예술가에게는 그것이 더 자주 찾아온다. <페임>은 이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안을 ‘예술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삼는다. 감독은 학생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의 긴장감,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의 좌절, 기대에 못 미쳤다는 실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다시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노래, 하나의 대사로 전환되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결국 창의성은 불안과 압박이 증폭된 그 지점에서, 생존을 위한 감정적 본능으로 피어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경쟁 구도 속에서도 학생들이 서로 자극을 주며 성장한다는 점이다. 다른 이의 훌륭한 연기나 무용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의 거리를 느끼고, 다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 복잡한 감정의 역학 속에서 창의성은 단지 기술적인 숙련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무대 위의 한 장면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의 파동이 오고 가는지를 끈질기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창의성의 본질이 단지 아이디어가 아니라, 감정에서 비롯된 진실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페임>은 불안이 단지 괴로운 감정이 아니라, 움직임의 에너지이며, 자기 확장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편안한 상태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긴장과 압박이라는 낯설고도 위험한 지대에서만 열리는 문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 때로는 부서지고, 때로는 포기할 뻔하지만, 결국 무대 위에서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순간은 단지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내면의 불안과 감정을 모두 끌어안고 나온 진짜 자기표현이다.

오늘날 창의성이 점점 산업화되는 시대에, <페임>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다. 창의성은 효율과 시스템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요동, 불확실한 미래, 실패에 대한 공포 같은 인간적인 결핍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진짜 예술의 출발점이며, 이 영화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다.

 

3. 지하철 안에서의 춤

영화 <페임(Fame)>은 예술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꿈과 좌절, 성장과 고통을 그려낸 작품이다. 뮤지컬 장르 특유의 경쾌함과 젊은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 구조 안에서 억눌린 개인들이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깊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뉴욕 지하철 안에서 펼쳐지는 즉흥적인 춤이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단순한 퍼포먼스나 유쾌한 이벤트로 보지만, 그 속에는 보다 근본적인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신체를 통해, 음악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움직임을 통해 표현된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상징적이다. 이는 일상의 반복, 도시의 리듬, 통제된 움직임, 그리고 제도화된 경로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공간 안에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질서 있게 움직인다. 말이 적고, 표정은 없으며,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거나 바닥을 향한다. 누구도 주목받지 않으며,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공간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등장인물들은 하나둘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깨를 흔들고, 발끝을 움직이며, 점차 온몸을 리듬에 맡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간다. 이 장면은 단순한 댄스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라는 무기력과 침묵 속에서의 감정 폭발이며, 권위와 규범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려온 개인의 목소리를 춤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페임 속 학생들은 예술이라는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배경을 갖고 있고, 제도 교육 속에서 끊임없이 평가당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들이 춤을 추는 행위는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지하철 안의 댄스는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상징이다. 제도화된 시스템 속에서 무명의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청춘들이, 단 몇 분간이나마 자기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방식이 바로 이 춤인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춤이 ‘무대’가 아니라 ‘거리’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무용은 공연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조명과 관객, 무대와 안무라는 형식적 틀 안에서 예술은 소비된다. 하지만 <페임>은 그 형식을 거부한다. 주인공들은 누가 허락하지 않아도,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라는 외침이자, “나는 통제받지 않겠다”는 몸의 저항이다. 이는 단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현실 속 도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플래시몹’이나 ‘스트리트 퍼포먼스’와 맞닿아 있다. 길거리와 지하철, 광장 같은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권위와 경계를 해체하는 성격을 띤다. <페임>의 춤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억압의 공간에서 자유를 외치는 몸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지하철이라는 장소가 주는 특유의 답답함, 폐쇄성, 반복성은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한다. 마치 숨 쉴 틈조차 없는 삶 속에서 학생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공간은 완전히 전복된다. 더 이상 그곳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유와 생명력이 폭발하는 무대가 된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사람들은 연습하지 않은 동작을 그대로 드러내며, 타인과의 즉흥적인 교감을 나눈다. 춤은 여기서 언어보다 더 직관적인 감정의 전달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곧 억압에 맞서는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으로 이어진다. 춤을 추는 이들은 뚜렷한 리더 없이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고, 서로의 에너지를 받아낸다. 그 모습은 민주적이며, 자발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표현’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고, 개인의 개성이 억눌린 채 집단 속에서 사라져 가는지를 반증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페임>은 이를 정확히 짚어낸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은 서로 다르고, 자유롭고, 개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화롭다. 다양성과 자유가 충돌 없이 어우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감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수많은 지하철 안의 사람들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가 그 틀을 깨고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낯설지만, 이내 부럽고 짜릿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페임>은 그 감정을 스크린 안에서 끌어올리고, 관객의 마음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움직여본 적이 있는가?” 지하철 안의 춤은 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예술이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움직임으로 시작되지만, 공간의 공기를 바꾸고,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며, 끝내는 침묵을 깬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단 한 줄의 대사 없이, 오직 ‘몸’으로만 이뤄진다. <페임>이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래서 강렬하다. 그것은 단지 춤이 아니라, 억압된 도시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선언이다.

결국 이 춤은 개인적인 해방의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술은 제도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틀을 흔드는 것이며, 몸은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페임> 속 지하철 춤은 그래서 단순한 안무가 아니라 하나의 ‘저항 행위’다. 말 대신 몸으로, 규율 대신 리듬으로, 통제 대신 자율로 대체된 이 퍼포먼스는, 예술이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