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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회의 유령화, 신부의 외면, 순종적 인간형

by borybory-click 2025. 7. 16.

영화 &lt;헹복한 라짜로&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9. 06. 20.
  • 장르: 드라마, 판타지
  • 평점: 8.61
  •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27분
  •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 주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루카 치코바니

 

1. <행복한 라짜로> 속의 사회의 유령화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단순한 성장 서사도, 감정 중심의 휴먼 드라마도 아니다. 이 영화는 굉장히 복합적인 층위를 품고 있으며, 시간의 개념과 계급 구조, 자본주의와 신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의 경계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라짜로라는 인물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타자화되고, 끝내 유령화 되어 가는가에 대한 정교한 묘사다. 라짜로는 영화 내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중심에 있음에도 주변화되고, 주체적 위치에 있음에도 대상화된다. 이는 단순히 ‘착한 인물’이라는 성격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구조적 폭력과 깊게 맞물려 있다. 이 글에서는 라짜로가 어떤 방식으로 타자화되고, 결국 사회적으로 유령화 되는지를 상세히 분석해 본다.

‘타자화’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우리’의 범주 밖에 두어 비정상화하거나 대상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라짜로는 태생적으로 이러한 타자화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너무도 착하고 순수하며, 현실적인 판단이나 방어기제가 거의 없다. 이 세계에서 그러한 존재는 이상적이기보다는 불편하다. 불편함은 곧 경계의 시작이다. 라짜로는 마르칸토니오 가문과 농민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그는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누구에게도 반항하지 않으며, 모든 요청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성품은 양쪽 모두에게서 거리감을 만든다. 그는 같은 노동자임에도 농민들 사이에서 완전한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귀족에게는 유용한 도구로만 인식된다. 그의 위치는 언제나 ‘외부’에 가까우며, 이는 그를 점점 더 사회적 타자로 만든다. 영화 속에서 라짜로는 말이 적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그가 무력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체제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침묵은 그를 점점 더 ‘비인간적인 존재’로 만든다. 사람들은 라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그를 이름 있는 인간이 아닌 ‘기능적 존재’로 인식한다. 이 과정은 사회적 타자화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영화의 중반부, 라짜로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깨어난다. 그러나 그의 재등장은 ‘기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투명한 존재가 된다. 이 시점부터 라짜로는 완전한 사회적 유령이 된다. 사회적 유령화란, 생물학적 생존과는 별개로 사회적 관계와 집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라짜로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만, 누구도 그를 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부활한 후 마주치는 사람들—농민, 귀족, 성직자, 도심 속 시민들—모두 그를 제대로 대면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무관심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그의 유령화는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착한 사람, 순응하는 사람,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불편함만을 유발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라짜로는 생산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소비하지 않는 존재이므로 ‘불필요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는 죽어야 했고, 다시 살아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자’로 남는다. 사회는 본래 개인을 보호하고,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공동체적 기능을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해체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라짜로의 철저한 고립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농촌 공동체는 이미 해체되었고, 도시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의 친구들조차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러한 고립은 단순히 외로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이름을 얻고, 기억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라짜로는 그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더 이상 ‘누군가의 누군가’가 아니다. 이름 없는 존재, 역할 없는 존재, 기억되지 않는 존재로서 그는 ‘살아있는 유령’이 된다. 이처럼 라짜로는 사회 구조 안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사람들은 그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존재의 근거가 사라진 유령화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소멸이다. 그렇다면 라짜로는 끝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인물일까? 단지 체제에 순응하며, 존재조차 지워져 버린 희생양일 뿐일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라짜로는 말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는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는가?” “왜 공동체는 이런 사람을 지워버리는가?” 그의 침묵은 단순한 무력함이 아닌, 체제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라짜로는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부각한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불편하고, 더 무력해진다. 라짜로는 결국 ‘착함’이라는 가치가 체제 안에서는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자, 반어적 장치다.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죽음은 사회의 책임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까지도 라짜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그를 통해 ‘무엇이 인간인가’ ‘우리는 누구를 외면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라짜로는 그렇게 유령이 되었지만, 그의 존재는 마지막까지 영화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윤리적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행복한 라짜로》는 단지 한 사람의 비극적인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는 ‘타자화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서 유령처럼 지워지는지를 섬세하고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라짜로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 가장 착한 인간이지만, 그 이상성은 체제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살아있지만 보이지 않는 자’가 되고, 존재는 무화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의 윤리성은 과연 어디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공동체 없는 세계에서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타자를 지워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라짜로라는 인물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라짜로’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고요하게 침묵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러나 그 유령 같은 존재들은 우리의 양심을 끊임없이 건드린다. 결국 《행복한 라짜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라진 존재들을 다시 보라. 그들을 잊는 순간, 우리도 유령이 된다.’

 

2. 영화 후반부 신부의 외면의 의미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현대 이탈리아 사회의 계급 구조와 자본주의적 모순을 농촌과 도시의 대조적 이미지 속에 은유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한 순수한 청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교, 도덕, 권력, 사회 시스템에 대한 치밀한 비판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관객을 가장 깊이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 신부가 라짜로를 바라보면서도 그를 외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대면의 실패가 아니다. 이 외면은 상징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곧 종교적 구원의 종말,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더 이상 ‘구제의 수단’이 아니라 방관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연출이다. 본 글에서는 그 장면이 어떤 방식으로 영화 전체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와 어떤 식으로 닮아 있는지를 살펴본다.

먼저 영화 전반에 걸쳐 라짜로는 ‘성자’ 혹은 ‘순교자’의 이미지로 반복된다. 그는 고통을 견디고, 모두를 돕고, 반항하지 않으며, 죽음을 맞이한 후 부활까지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설정은 단순히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나사로(Lazarus)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감독은 라짜로라는 인물을 통해 종교적 상징을 직조하며, ‘착함’이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라짜로는 끊임없이 외면당한다. 농민 공동체에서도 그는 도구적 존재로 소비되었고, 도시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는 자’로 전락한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단 한 번의 구원, 정의로운 판단, 선의의 개입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교회’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신부를 통해 영화 후반부에서 등장한다. 라짜로는 도시의 한 성당에서 신부를 만나게 된다. 그 장면에서 신부는 라짜로를 보고 명백하게 놀란다. 마치,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을 보았다는 듯한 그 놀라움은, 라짜로가 정말로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라짜로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눈을 피한 채 걸음을 돌린다.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한 회피나 당혹감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기관이 더 이상 ‘기적’과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윤리적 해체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신부는 시스템 안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의 언어를 말하며, 현실 속에서 제도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외면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종교의 구조 자체가 ‘구원’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행복한 라짜로》는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 왔던 역할, 즉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고, 죄와 정의를 구분하며, 억울한 자를 대변하는 역할을 완전히 탈색시킨다. 그 중심에 신부가 있다. 신부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상황에 마주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지 않으며, 라짜로가 겪은 불합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침묵은 ‘현대 교회가 어떻게 현실 문제에 대해 아무런 윤리적 개입을 하지 않는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때 교회는 사회적 정의의 중심이었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 성직자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서사를 정면으로 해체한다. 성직자가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현대 종교가 놓인 아이러니한 현실이라는 점을 영화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중요한 점은, 이 외면이 개인적인 무관심이 아니라, 체제적인 침묵이라는 것이다. 신부는 체제에 순응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지만, 영혼을 구제하지는 않는다. 즉, 그는 기능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살아 있으나 죽은 듯한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는 라짜로가 부활했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영화의 구조와 정확히 평행한다. 그 침묵은 라짜로의 존재를 한 번 더 지운다. 이전까지는 귀족 계급과 공동체가 라짜로를 소비했다면, 이제는 윤리적 최후의 보루인 종교마저 그를 버린다. 구원의 가능성이 닫힌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성자의 부활’조차 아무 의미도 만들 수 없는 체제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라짜로는 끝내 죽음을 맞는다. 그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마지막 희망마저도 거절당했을 때 벌어지는 ‘존재의 소멸’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책임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손 내밀지 않았던 종교에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신부는 끝내 돌아오지 않고, 공동체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착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결말은 종교가 더 이상 현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아니, 구원할 의지가 없다는 날카로운 선언이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신부는 단지 하나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현대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의 외면은 단지 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구조적 무관심을 의미한다. 더 이상 기적은 감동이 되지 않고, 부활은 감탄이 되지 않으며, 순수함은 체제 안에서 불편한 이물질로 취급된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외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우리는 솔직히 대답할 수 있을까? 신부의 외면은 단순한 시선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제도화된 종교가 어떻게 ‘선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외면하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자, 구원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깊은 비극이다.

 

3. <행복한 라짜로>의 순종적 인간형

우리는 흔히 착한 사람을 미덕의 상징처럼 여긴다. 착한 성격, 순종적인 태도, 반항하지 않는 자세는 사회적으로 환영받는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러나 과연 그런 ‘착한 사람’은 항상 바람직한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해,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매우 불편하고도 통렬한 답을 던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 라짜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순종적인 인간’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거절하지 않으며, 타인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의심도, 요구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라짜로는 성자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그 성스러움이 오히려 체제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권력을 지속시키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고발한다. 이 글에서는 ‘순종적 인간형’이 사회 체제의 연장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영화 속 라짜로의 서사를 통해 분석하고,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초반, 라짜로는 고립된 농촌 공동체 이네 비타빌레에서 일하는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는 농장을 지배하는 귀족 가문의 요구에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순응한다. 비가 오든, 해가 지든, 일이 과중하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한다. 다른 농민들은 불만을 품거나 몰래 불법적인 탈출을 꿈꾸지만, 라짜로는 어디까지나 이 공동체의 규율을 따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의 순종은 단순히 착한 성격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시스템 내 ‘기능’처럼 작동한다. 공동체를 지배하는 귀족 여주는 라짜로의 이런 순종성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를 앞세워 노동을 유지하고, 농민들을 통제하며, 자신이 이 모든 시스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강화한다. 라짜로는 그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나 위치조차 따져보지 않는다. 영화는 그 무의식적 순종성을 통해 ‘순종적 인간형’이 사회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권력자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체제나 권력이 ‘저항’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로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조의 불합리함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유지시키는 윤활유가 되기 때문이다. 권력은 저항을 억압하고, 순응을 보상하며, 그렇게 자신을 지속시킨다. 라짜로는 체제 안에서 가장 충직한 존재다.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봉사할수록, 귀족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노동의 착취가 죄책감 없이 반복되고, 농민 공동체는 라짜로의 모범을 따르며 점점 더 자기 검열에 빠져든다. 그는 단 한 번도 ‘왜’를 묻지 않는다. “왜 이렇게 일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귀족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지”, “왜 우리에게는 권리가 없는지” 등, 체제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구조의 질문을 지우고, 의심을 제거한다. 이로써, ‘순종적 인간형’은 혁명보다는 체제의 영속성에 기여하게 된다. 라짜로의 순종은 도덕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그는 심성이 착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다. 그러나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그 착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그 순종은 과연 윤리적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순종은 도덕적인 가치이면서도, 동시에 비윤리적인 체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라짜로는 아무리 착해도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착함으로 인해 체제를 지지한다. 귀족 가문은 라짜로 같은 존재 덕분에 착취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실행할 수 있다. 이처럼 체제는 ‘순종적인 도덕’을 끌어들여 자기 자신을 윤리적으로 포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반복된다. “성실하게 일하면 된다”, “조용히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같은 담론은 모두 순종을 미덕으로 내세우며 현실의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도구다. 체제는 순종을 장려하면서 저항을 비도덕적으로 낙인찍는다. 그 과정에서 라짜로와 같은 인물은 이상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무력한 자이자, 체제 연장의 열쇠가 된다. 영화 후반부, 라짜로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다. 그러나 도시는 농촌보다 더 냉혹하고, 그의 순종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않고, 그의 선함을 반기지 않는다. 순종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며, 오히려 어리석음처럼 보인다. 그가 여전히 같은 태도로 세상에 접근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고, 친구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선함은 인정받지 못하고, 그의 존재는 점점 투명해진다. 이러한 유령화는 순종적 인간형이 현대사회에서 ‘쓰임이 다했을 때’ 어떤 식으로 퇴장당하는지를 보여준다. 체제는 필요할 때만 순종을 소비한다. 농촌이라는 닫힌 공동체 안에서는 그의 순종이 권력의 연장 도구였지만, 도시라는 복잡한 계층 시스템 안에서는 그 순종이 ‘쓸모없는 자’의 특징이 된다. 결국, 라짜로는 어느 체계 안에서도 자리를 잃는다. 이 점에서 영화는 순종이라는 미덕의 허상과,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도구화하다가도 버려지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행복한 라짜로》는 착함과 순종이라는 개념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그것들을 좋은 것으로 배워왔고, 그렇게 살라고 요구받아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한다. 순종적 인간은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권력을 돕는다. 라짜로는 가장 순수한 인물로 보이지만, 그 순수함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누구도 구하지 못하며, 본인조차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가 ‘순종’을 어떻게 포장하고 이용하며, 결국 불필요해지면 어떻게 폐기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진실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도 라짜로 같은 이들이 있다. 묵묵히 견디며,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고, 체제의 요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 부르지만, 정말 그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순종은 정말로 미덕인가? 혹은, 순종은 결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길들여진 하나의 장치일 뿐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