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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환상의 빛> 빛과 어둠, 감정 억제 표현법, '참음'의 미학

by borybory-click 202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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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봉일: 2016. 07. 07.
  • 장르: 드라마
  • 평점: 8.17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9분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주연: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1. <환상의 빛> 속 빛과 어둠

영화 <환상의 빛>은 일본 영화 특유의 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지닌 작품으로, 슬픔과 상실, 기억과 시간의 흐름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연출 요소 중 하나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한 시각적 구도이다. 단순한 명암의 배치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 상태, 정서의 움직임, 존재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로서 빛과 어둠이 활용된다. 감독 이와이 순지는 이 영화 속에서 말보다 조명과 프레임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며, 관객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감정을 스며들게 만든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등장하는 어두운 실내 공간은 주인공 유미코의 내면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남편을 자살로 떠나보낸 유미코는 여전히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고, 그 정서는 조명 설계와 미장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자연광, 낮인데도 전등을 켜지 않은 어둑한 실내, 차가운 청색 톤의 조명은 유미코의 정서적 고립감을 시각화한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외로움을 감추고 있으며, 빛은 그녀의 일상에서도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조명의 배치가 아니라, 내면세계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머물러 있다는 점을 상징한다. 반면, 영화 중반 이후 새 남편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유미코가 조금씩 변화하는 장면에서는 조명의 톤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지만, 어두운 방에 서서히 따뜻한 주광이 스며들듯 연출된다. 이러한 조명 전환은 유미코가 감정적으로 약간의 수용을 시작했음을 은유한다. 영화는 이처럼 인물의 감정이 변화할 때 그것을 대사나 행동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명과 프레임 속 어둠과 빛의 밀도로 조심스럽게 표현해 낸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시각적 장면이 인물의 심리 상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도록 설계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내면을 느끼게 만든다. <환상의 빛>에서 죽음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감정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에서 죽음은 더 이상 삶과 구분되는 완전한 이질적 개념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로 조용히 스며든다. 감독은 이 죽음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어둠이라는 요소를 통해 공간 속에 자리 잡게 한다. 남편의 죽음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항상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얼굴이 반쯤 어두운 상태로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인물이 혼자 있을 때 배경은 철저하게 어둡고 차갑게 연출되며, 배경음악조차 없는 침묵 속에서 그 어둠은 관객의 심리까지 감싼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유미코의 심리적 거리감, 소외감, 삶의 방향 상실 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음을 내면화한 인물이며, 이러한 ‘반쯤 살아 있는 상태’는 영상의 빛의 사용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너무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중간 상태의 회색 톤은 죽음을 직면한 인간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부유하는 감정을 담고 있다. 감독은 이러한 색조와 조명의 구성으로 무형의 감정, 즉 상실감, 후회, 감정적 고립 같은 정서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변환시켜 낸다. 빛이 사라지는 장면에서는 특히 정적인 카메라와 롱테이크 기법이 결합되어, 시청자 스스로 그 어둠을 오래 마주하게 만든다. 어둠은 곧 감정의 구덩이이며, 유미코가 빠져나오지 못한 내면의 공간이다. 대사 없이도 무거운 공기가 감돌게 만드는 이 어둠의 연출은 단순히 슬픈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다. 영화 후반부에서 유미코는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점차 빛 속으로 이동한다. 아이가 웃고, 자연광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유미코가 이전보다 현재에 집중하려는 감정 변화를 암시한다.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는 남아 있지만, 빛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상기시켜 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빛은 과도하게 밝지도 않고, 따뜻하면서도 절제된 톤으로 유지된다. 삶의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열렸음을 보여주는 조심스러운 희망의 메시지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빛을 극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흔히 클라이맥스에서 드라마틱한 조명 변화로 감정을 강조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환상의 빛>은 매우 느리게 빛의 비율을 변화시킨다. 마치 계절이 변하듯, 아주 천천히 조명의 색감과 방향, 명암을 달리함으로써 유미코의 감정 변화도 그만큼 느리게 진행된다. 이는 관객에게도 감정을 재촉하지 않는 영화적 여백을 제공하며, 스스로 인물의 감정 흐름을 체감하게 만든다. 유미코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빛을 받는 장면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그녀는 측면광이나 반역광 속에 존재하며, 이로 인해 그녀의 표정 일부는 항상 그림자에 가려진다. 이는 그녀의 감정 상태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여전히 분열된 상태에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와 같이 빛은 단순한 조명의 기능을 넘어서, 인물의 정체성과 내면의 상태를 함축적으로 시각화하는 상징이 된다. <환상의 빛>은 관객의 감정을 조작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동화되기를 기다리는 영화다. 그 핵심에는 시각적 언어로서의 빛과 어둠이 있다. 시청자는 이 영화에서 감정을 느끼기보다 감정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는 매우 일본적인 감정 묘사 방식이기도 하며, 서양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단적 감정 폭발 대신, 은은하고 지속적인 감정의 물결을 통해 공감을 유도한다. 빛과 어둠은 바로 이 정서적 흐름을 인도하는 도구로 작동하며, 대사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유미코가 남편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듯 말 듯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어떤 언어보다 강한 감정의 전달력을 가진다.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희미한 석양빛은 어두운 과거를 비추는 조용한 애도의 언어이며,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감정의 결심을 암시한다. 이때 빛은 감정의 재료이자 정서적 연결 고리로 기능하며, 유미코와 관객, 그리고 영화 전체를 하나의 감정으로 엮는다.

빛과 어둠을 중심으로 구축된 이 영화의 시각적 구도는 단순히 영화 연출의 기교가 아니라, 인간이 감정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삶과 죽음, 애도와 회복, 침묵과 고백 사이에서 빛과 어둠은 늘 함께 존재하며, 그 조합은 영화 <환상의 빛>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이 시각적 대비를 통해 슬픔이 반드시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결국, 빛과 어둠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존재이며, 인간의 감정 또한 그러한 대비 속에서 비로소 깊이를 얻는다.

 

2. 일본 영화의 감정 억제 표현법

일본 영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독특한 미학을 가지고 있다. 소리 없이 전개되는 갈등, 눈물 없이 느껴지는 슬픔, 절제된 연기 속에서 흐르는 내면의 소용돌이. 이러한 감정의 억제는 단지 문화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일본 영화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정서적 표현 방식의 일부이자, 장르적 전통으로 자리 잡아 왔다. 특히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은 감정의 억제를 미학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작품으로, 말 대신 침묵이, 눈물 대신 정적이, 격정 대신 거리감이 주는 감정의 깊이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일본 영화에서 감정의 억제는 단지 연출 기법을 넘어서 내러티브 전략으로 기능한다. 격정적인 드라마나 극적인 반전을 주로 사용하는 서구 영화와 달리, 일본 영화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감정을 간접적으로 흐르게 만든다. 이는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조화 중심의 문화,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정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이 직접 눈물을 흘리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정적으로 구성된 화면과 침묵 속에서 읽어내게 된다. 감정 억제는 이야기의 리듬을 느리게 만드는 동시에, 관객의 몰입을 위한 ‘여백’을 제공한다. 이 여백은 관객 스스로 인물의 감정을 상상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다. 따라서 일본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을 체험한 관객은 오히려 더 깊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환상의 빛>은 이러한 정서를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한 작품 중 하나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인물들의 대사 수는 매우 적고,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은 절제되어 있지만, 정적인 미장센과 조용한 시간의 흐름 속에 인물의 상실, 슬픔, 불안이 스며들어 있다. 영화 <환상의 빛>은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조용히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 유미코는 남편의 자살 이후 깊은 상실감 속에 살아가지만, 그녀는 울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슬픔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느릿한 걸음,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씩 새어 나온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감정이라는 것을 굳이 표면으로 끌어내지 않더라도, 사람의 내면에는 끝없이 많은 이야기와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점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가능하게 한 핵심은 바로 감정을 억제하는 방식의 연출이다. 유미코의 표정은 대부분 무표정에 가깝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변화가 존재한다. 입꼬리의 긴장, 눈빛의 흔들림, 손의 움직임처럼 작고 섬세한 신체 표현이 감정의 깊이를 대신한다. 배우 에스미 마키코는 과도한 연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인물의 감정을 더욱 진실하게 전달한다. 카메라는 이를 가까이서 보여주기보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자처럼 머문다. 이 거리감은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함과 동시에 관객에게 직접적인 동정심이나 연민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몰입을 유도하는 이 ‘정서적 거리두기’는 일본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다. 또한, 음악의 사용 역시 감정을 억제하는 연출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환상의 빛>에서는 감정을 끌어올리는 멜로디나 극적인 사운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소리, 정적, 바람 소리, 발걸음 소리 같은 현실의 소리가 감정을 대체한다. 이 같은 사운드 디자인은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며 관객의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지 않고, 오로지 화면과 인물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감정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것을 조용히 안고 가는 방식으로 시청자에게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일본 영화는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더 강하게 만든다.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더 슬프고, 화를 내지 않지만 더 억울하며, 사랑을 고백하지 않지만 그 마음이 분명히 전달되는 방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출은 서사 전개보다는 감정의 정착을 우선시하며, 인물의 내면 변화에 천천히 접근하는 구조를 취한다. <환상의 빛>에서는 유미코가 자신을 둘러싼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감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감내의 시간은 억제된 정서 속에서 점차 관객에게 공유된다. 억제된 감정은 시청자에게 스스로 감정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능동성을 부여한다. 이는 일본 영화가 관객을 ‘소비자’가 아닌 ‘공 감자’로 대우한다는 방증이다. 이와이 순지의 연출은 이러한 감정 억제 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굳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카메라는 결코 인물을 몰아세우지 않고, 인물 스스로 침묵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끔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일본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일본 영화에서 감정이 억제되는 표현 방식은 단지 영화적 선택이 아니라, 일본 사회와 문화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와(和)'라는 조화의 가치를 중시해 왔고, 갈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내면화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적용되며, 개인은 집단 속에서 감정을 자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문화는 자연스럽게 예술 전반, 특히 영화라는 시각 예술에 반영되었다. 감정의 표현을 억제한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이 더욱 내면화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일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 구성 방식—예를 들어, 인물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 서로의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흐르는 장면—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오히려 더 큰 감정이 정적 속에 숨어 있다는 믿음이 일본 영화의 미학을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과 글로벌 콘텐츠의 확산 속에서도, 일본 영화의 감정 억제 표현 방식은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일종의 ‘과잉 소비’로 느껴질 수 있는 시대에, 일본 영화는 여전히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통해 관객과 교감한다. <환상의 빛>은 1995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은 감정의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 인물의 내면을 침묵 속에서 감지하고, 정적인 장면을 통해 감정을 유도하는 이와 같은 접근은 현대의 감정 과잉 콘텐츠 사이에서 오히려 신선한 울림을 제공한다.

감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존중하고 천천히 전달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이는 영화의 미학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이기도 하다. <환상의 빛>은 그러한 철학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영화이며, 이와이 순지 감독의 정서적 통찰이 담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환상의 빛> 속 '참음'의 미학

영화 <환상의 빛>을 보고 난 후 가장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정서는 ‘조용함’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리가 작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물의 대사, 감정, 행동, 화면 구성 모두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억제된 채 흐른다. 슬픔을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힘. 일본 영화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이러한 특유의 정서적 조형은 '참음'이라는 문화적 태도에서 비롯된 미학적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환상의 빛>은 바로 그 '참음'의 미학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참음’은 감정을 억누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하지만 일본 영화 속에서 보이는 ‘참음’은 단순한 인내나 억제가 아니라, 감정을 서둘러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그 감정의 깊이를 감당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영화 <환상의 빛>에서 주인공 유미코는 남편의 자살 이후에도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울지도 않고, 슬픔을 외치지도 않으며, 심지어 남편을 원망하는 말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일상적인 행동을 계속하고, 아이를 키우고, 다시 결혼을 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 모든 행동 이면에 존재하는 거대한 정서를 읽어내게 된다. 감정을 참는다는 것은 감정을 숨긴다는 것과는 다르다. 숨긴다는 것은 감정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라면, 참는다는 것은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지연시키고 그 무게를 온전히 자기 안에 품고 가는 것이다. 유미코는 고통을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 감정을 끌어안으며, 시간을 두고 조금씩 소화해 낸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유미코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 깊이 자리 잡은 정서적 태도이기도 하다. 일본 문화에서는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것을 미성숙하거나 사회적 조화를 해치는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환상의 빛>은 격렬한 감정보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인물의 감정 상태를 대사나 극적인 연기로 드러내기보다, 미장센을 통해 조용히 암시한다. 유미코가 앉아 있는 방 안은 늘 조도가 낮고, 물리적으로도 넓지 않은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화면의 구도는 인물에게 여유 공간을 크게 주지 않으며, 프레임 내에서 조용히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억눌린 상태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카메라는 자주 인물의 뒷모습이나 측면을 잡는다. 정면을 응시하거나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은 거의 없으며, 이는 그녀가 감정을 ‘참고’ 있는 상태를 시각적으로 부드럽게 묘사하는 장치이다. 특히 그녀가 거리를 걷는 장면이나, 아이를 바라보는 장면,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는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 조용한 순간들이 모여 강력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유미코가 슬픔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관객은 그 슬픔의 깊이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는 영화의 리듬, 편집, 조명, 색감 등의 모든 요소가 ‘참음’이라는 정서적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조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참음’은 일본 문화의 기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일본어로 ‘가만히 있는 것’,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버티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 ‘가만(我慢)’은 단순한 인내를 넘어선 사회적 규범처럼 작용해 왔다. 이런 태도는 영화뿐 아니라 일본의 문학, 연극, 미술 등 예술 전반에 반영되어 있으며, <환상의 빛>은 그것을 영화적 언어로 가장 정교하게 번역해 낸 예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거나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을 삼가야 할 일로 여겼다. 슬픔이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감내하는 것이 성숙한 인간의 자세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무사 문화의 영향이기도 하며, 집단 중심의 문화 구조 속에서 ‘참는 것’은 관계의 안정을 위한 기본 태도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영화에서 인물들의 행동 방식, 대화 스타일, 카메라의 거리,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의 방식 등에 그대로 투영된다. <환상의 빛>에서는 유미코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장례식 장면도 조용하게 치러지며,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눈에 띄지 않게 흘러가고, 인물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린다. 관객은 그 속에서 캐릭터가 감정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을 ‘안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환상의 빛>에서 장면의 속도와 리듬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조율함으로써 ‘참음’의 감정을 더욱 강조한다. 대사의 템포는 빠르지 않고, 인물 간의 대화 사이에는 종종 긴 침묵이 흐른다. 컷 전환도 많지 않으며, 한 장면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체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감정의 서사를 재촉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하는 연출 방식이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에게도 일종의 ‘참음’을 요구한다. 영화의 진행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는 인내심을 갖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해야 하며,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 속에서도 감정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공감과 체험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참는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영화 <환상의 빛>은 이러한 감정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모든 시청각적 요소를 조율하고 있다.

<환상의 빛>은 감정 표현의 정반대 방향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다. 말없이 슬퍼하고, 눈물 없이 상실을 품고, 미소 없이 관계를 지켜나가는 방식은 일본 영화가 가진 정서적 깊이와 맞닿아 있다. ‘참음’은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감정을 더 성숙하게 다루기 위한 한 방식이며, 그것은 미학이자 철학이다. 일본 영화는 이 감정의 흐름을 억제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연출은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인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며, 관객이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감정을 찾아내기를 기다린다. 영화 <환상의 빛>은 ‘참음’이라는 정서적 태도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어떻게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예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감정의 언어가 된다.